형제복지원 나왔더니 염전에 팔려
“거기서 지내며 정신줄 다 놓은 것 같다”
‘행불’ 아들 찾던 집안, 풍비박산
여성은 성폭력 피해로 더 큰 고통

출처=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피해자에게 진정한 자유와 회복은 없었다.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청년은 원양어선과 새우잡이 배를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공부해야 할 나이에 매를 맞아가며 돌 깨는 작업에 동원됐던 소년은 복지원을 나온 뒤에도 염전에서 노동착취를 당했다. 30~40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며 햇빛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낸 삶도 있었다. 범죄에 빠져 교도소를 들락거렸던 인생도 있다. 그들은 모두 ‘끝나지 않은 국가의 폭력’을 호소했다.

강제수용 이후의 삶이 산산 조각난 건 피해자 개인뿐만이 아니었다. 자녀를 찾으러 다니다 가정이 파탄 난 사례는 흔했다. 한 아버지는 나이 50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을 찾으러 전국을 헤매다 폐인이 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에서 비롯된 비극의 악순환이다.

연구팀은 “형제복지원에서 벗어났지만 그 이후의 삶에서 폭력, 박탈, 착취, 낙인은 끝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형제복지원에서 ‘염전 노예’로

김모(54)씨는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진 뒤에야 그곳을 나올 수 있었다. 수용생활 5년 7개월만의 탈출이다. 그는 엄마를 찾으러 부산역 근처 파출소를 갔다가 형제복지원에 보내졌었다. 곡괭이로 돌을 깨는 일에 동원됐는데 할당량을 못 채우면 얻어맞았다. 성폭행도 당했다. “엎드려서 빠따(매)를 맞고, 밤에는 잠도 못 자게 못된 짓을 당했다.” 소년에게 주어진 식사라곤 ‘벌거지(벌레)가 나오는 국’과 ‘설익은 보리밥’ 정도였다. 먹고 나면 설사가 나왔다.

원장이 잡혀갔지만 그는 보호받지 못했다. 가족을 찾지 못해 다시 노숙생활을 했다. 부산역을 떠돌다가 만난 형제복지원 출신 소대장이 그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말을 믿고 고물상에서 두 달 일했지만 돈을 모두 뜯겼다. 목포역으로 도망갔지만 같은 소대장에게 잡혔다. 소대장은 이번에는 그를 염전으로 팔았다.

“전라도 진도의 염전으로 보내져서 3년 있다가 또 도망을 나왔다. 돈 못 받고 일만 하다가 도망갔는데, 이번에는 터미널에서 잡혔다. 그래서 구자도에 김 만드는 곳으로 가서 또 5년을 있었다. 그 주인도 ‘니 데리고 온 사람이 (돈) 다 받아갔다’고 했다.”

해양경찰 도움으로 간신히 섬을 탈출했다. 이후 그는 재활의 집을 운영하는 목사의 도움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과 장애등록을 했다. 그의 기구한 삶은 한 번도 보상받지 못했다.

출처=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에서 ‘정신과 환자’로

고아원 출신 김모(65)씨는 10살 때 그곳을 나와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살았다. 20살 때 부산역에서 경찰에 잡혀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흙벽돌 막사에서 인부들과 탈출했다.

“탈출해서 시골 방앗간 일을 도와주고 그랬어요. 근데 부산은행 앞에 거지꼴로 있으니까 단속반이 형제복지원에 다시 데려다 줬어요.” 1년 만에 다시 잡혀 들어 다시 10년을 살았다. 복지원은 그를 정신과병동으로 보내버렸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고 복지원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정신과병동에 있던 그는 다른 정신병원으로 이송됐다. 이후 33년이 지날 때까지 그의 세상은 정신과병동을 벗어나지 못했다. 연락되는 가족이 없어 밖으로 외박조차 나가지 못한 그는 여전히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김씨 같은 재원 피해자는 그동안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복지원 폐쇄 이후 곧바로 정신병원 등으로 전원 돼 평생을 시설에서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층 인터뷰에 응한 재원 피해자 9명은 복지원에서 나온 이후 시설 혹은 정신병원에서 짧게는 10개월, 길게는 43년을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9명 중 5명은 현재 정신과병원에 입원 중이다. 이중 4명은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이후 33년을 쭉 시설에서 보냈다.

합천에 살던 이모(63)씨는 20대 초반 공장 취직을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가 형제복지원에 들어갔다. 오빠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뇌물을 줘 동생을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이미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생활이 10년이 넘어간 시점이었다.

이후 그는 33년을 정신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긴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형제복지원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떤다. 심층면접에서 형제복지원에 대해 물으면 갑자기 면담실을 나가거나 불안감을 호소했다. 이씨 오빠는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햇빛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고 있다. 2년 전부터는 제대로 대화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형제복지원에서 5년을 보낸 하모(62)씨도 33년째 정신병원에서 생활 중이다. 하씨는 형제복지원을 ‘또라이병원’ ‘나랑 상관없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떠올리기 싫은 그곳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다. 하씨 둘째 오빠는 “복지원 생활을 하면서 정신줄을 다 놓은 것 같다. 그 얘기를 들으면 눈이 확 뒤집어지고 안색이 변했다”고 했다.

연구팀은 형제복지원 수용 경험이 정신질환의 발병이나 증세 악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복지원 측에서는 정신질환이 있어 수용을 했다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우리는 그 반대로 형제복지원이 정신질환의 원인이 됐다고 추측한다”고 말했다.

시설의 폐쇄성과 정신질환 특성을 고려하면 이들처럼 ‘지워진 피해자’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시설에 거주중인 피해자 중에서는 피해 신고조차 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강제조사권이 없는 탓에 시설 피해자를 포함한 전수조사는 여전히 어려운 상태다.

김경일 사회복지연대 사무국장은 “시설에 있는 피해자를 찾아내려면 형제복지원 이후 시설 전원 기록을 추적하고 추적해야 하는데 현행법상 (이런 조사를)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남 교수도 “시설에 있는 피해자 중에 정신장애를 가진 분들은 면접조사가 어려운데다 아직 피해신고가 되지 않은 분들도 많았다”며 “이번 조사에서도 시설 협조가 잘 되지 않아서 알음알음 소개를 받아 시설에 있는 피해자들과 면담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산산조각 난 삶

A씨(63)는 수용생활 2년 만에 형제복지원을 빠져 나왔다. 복지원에 끌려갈 무렵 출산 직전이었던 아내는 어린 딸을 키우고 있었다. 일상에 적응해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복지원에서 탈출과 매질을 반복해 겪었던 A씨에게는 “마음의 벽이 만들어져” 있는 상태였다.

“형제복지원을 나오고 35살 정도까지도 분노장애를 겪어서 어디서 일을 못했어요. 일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폭발을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나온 그는 뱃일을 시작했다. 원양어선을 탔다가 새우잡이 배에 올랐다. A씨는 “중소기업도 들어가 봤는데, 1년만 넘어가면 한계가 나타났다. 배운 게 없으니 따라가질 못하고 뒤처지게 됐다”고 했다. 지금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어렵다. “나를 안 좋게 여기고 이상하게 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복지원 퇴소 후 가족을 되찾은 경우는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가족과 재회했지만 생활을 이어가지 못한 이들도 31명이었다.

B씨(56)는 아버지가 나이 쉰에 본 귀한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보기 어려웠던 축구공과 텔레비전도 사줬다. ‘금지옥엽’이던 그의 인생이 바뀐 건 10살 때였다. 동네 형들과 수영을 하러 해운대에 갔다가 부산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성폭행, 강제노동, 굶주림을 견디며 3년을 보냈다. “나이 많은 형들이 도망가다 잡혀오면 몽둥이로 개 패듯이 패니까” 그는 도망갈 엄두도 못 냈다.

3년 만에 돌아온 집은 풍비박산 난 상태였다. 아들이 사라진 그날 이후 엄마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예순이 된 아버지는 전국의 기차역을 돌아다니며 아들만을 찾으러 다니다가 폐인이 됐다. 여동생은 ‘오빠 때문에 부모님이 이렇게 되시고 집이 망해버렸다’고 그를 원망했다.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B씨는 그대로 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형제복지원을 나온 이후 다시 공부를 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 남의 집 소 키우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형제복지원 퇴소 후 학교에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110명(73.8%)에 달했다. 학교를 다시 다닌 39명(26.2%) 중에서도 8명은 학업을 다 마치지 못했다. 남 교수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보통 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 잃어버린 삶을 사회적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더 큰 고통 받는 여성 피해자들

C씨(50)는 1979년 부산진역에서 오빠를 기다리다 파출소로 옮겨진 뒤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9살 때 일이다.

어린 나이었지만 키가 커 아동 소대가 아닌 여성 소대로 가게 됐다. 여성들은 속옷을 지급받지 못해 입고 들어온 속옷을 여러 번 꿰매 입고 있었다. 생리대도 주지 않았고, 기저귀로 쓰라며 천을 4개씩 줬다. 허구한 날 맞았다. 그녀 역시 한 남자아이에게 몰래 쪽지를 보내다가 들켜 허벅지가 터지도록 매를 맞기도 했다. 그 일로 근신 처분을 받아 정신병동에서 몇 개월 일하게 됐다. 거기서 그녀는 생지옥을 목격했다.

그곳에서 강간당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접 낙태수술까지 진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정신병원에 있는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폭행이 심했다. 발달장애 아동들을 모아놓고 ‘정박아실’이라고 불렀는데, 이곳 여성들까지 따로 불려나가 성폭행을 당했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동료 6명과 함께 탈출을 계획했다. 모진 세월을 버텨가며 숙소 철창을 수개월 간 조금씩 뜯어 나왔다.

6년 만에 돌아간 집에서도 고통은 계속됐다. 아버지는 그동안 딸을 찾는다고 몇 년 간 거리를 헤매다 폐암에 걸렸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 새엄마는 “너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며 밥도 안줬다. 집에 머물 수가 없어 다시 홀로 생활을 시작했다. 과거 일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결혼 후 가정을 꾸린 뒤에도 트라우마는 그를 짓눌렀다. 방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을 자기 위해선 술을 마셔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TV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폭로되는 걸 봤다.

“나도 저기 있었어.” 처음 딸들에게 과거를 털어놓은 뒤에야 심정을 이해받을 수 있었다. 문무일 전 검찰총장이 사과했을 때 딸은 ‘고맙다. 엄마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여성은 6명뿐이다. 당시의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일이 힘들어 침묵하는 여성이 많아서다. 재원 피해자 심층 면접을 총괄한 유숙 송국클럽하우스 소장은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피해자분들은 당시 이야기를 꺼내면 아무 말을 못하고 울거나 인터뷰자리를 박차고 나가 숨기도 했다”며 “기억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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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빈 김판 임주언 박세원 기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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