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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어른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할머니는 제 삶의 멘토세요.” “제 인생 최고의 여성이자 롤모델이십니다.” “참 멋진 삶을 사시네요, 존경합니다.”

노인이라면 경로사상은커녕 여차하면 ‘틀딱충’(틀니를 딱딱거리는 벌레라는 뜻)이라는 험한 소리가 날아오는 세상인데, 그의 콘텐츠는 온통 이런 예쁜 말만 가득한 댓글 청정지대다. 유튜브 채널 개설 6개월여 만에 구독자 46만명을 매료시킨 유튜버 장명숙(68)씨 얘기다. 밀라노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장씨는 이탈리아어로 ‘밀라노 할머니’라는 뜻의 ‘밀라논나’라는 이름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86서울아시안게임 개폐회식 무대의상을 디자인했고, 명품 ‘페라가모’와 ‘막스마라’를 국내에 들여온 패션 1세대다. 유튜브에서 다양한 패션 노하우를 소개하는 그는 친정아버지가 입던 80년 된 셔츠를 공개하는 등 남다른 아이템을 선보인다. 스스로를 ‘늙은이’라 부르지만 하얗게 센 머리를 손수 자르는 영상에는 영화 ‘아저씨’에서 머리를 자르던 원빈 못지않은 포스가 흐른다. 하지만 그는 그저 단순한 멋쟁이 할머니가 아니다.

“미래를 준비는 하시되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즐겁게” “어떤 길이 내 앞에 펼쳐져 있을지 모르니 산이라면 넘고 강이라면 건너자, ‘이래 볼걸 저래 볼걸’ 하지 말자, 그리고 징징거리지 말자” “젊은 분들이 명품 많이 좋아하는데, 본인 스스로가 명품이 되세요” “저는 매일 설레요, 매일이 새로운 날이잖아요” 같은 연륜이 담긴 품격 있는 말이 젊은 세대를 사로잡는다.

그에게는 세상 살아가는 법을 묻는 댓글이 쇄도한다. 두 아들을 키우며 일하느라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서 건빵을 많이 먹었다는 그에게 워킹맘이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방법을 묻는 식이다. “패션 채널이 아니라 인생수업”이라거나 “이런 어른이 너무 필요했어요”라는 댓글에 이르면 존경할 만한 어른에 대한 2030세대의 갈증이 이 정도였나 싶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그린 영화 ‘저 산 너머’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도 존경받는 어른이 없는 시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코로나19로 극장가에 이렇다 할 흥행 기대작이 없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진짜 큰 어른이었던 김 추기경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스크린으로 소환한 것일 테다.

물론 누구나 나이와 상관없이 동등한 개인으로 대접받아야 하고, 어른을 찾는 것이 전근대적인 유교문화라 여길 수 있다. 지난달 전화 인터뷰로 만난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64)씨는 “나이 든다고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청년세대의 지성과 감성이 노년층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며 “청년층과 중노년층이 서로 존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중장년 독자를 위해 ‘마흔에게’와 ‘늙어갈 용기’를 쓴 그는 “노인은 청년의 좋은 모델이 돼야 하지만 쉽지 않다”면서 “그래서 계속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마흔이 돼도 예순이 돼도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올해 93세가 되신 시인 김남조 선생님 댁으로 지난달 초 인터뷰를 청하는 전화를 드렸다. 얼마 전 열아홉 번째 시집 ‘사람아, 사람아’를 펴낸 여전한 현역이시다. “아, 국민일보, 점잖은 신문이죠.” 직접 전화를 받으신 선생님의 목소리는 맑고 정정했다. 상반기 중 출간될 선생님의 시 전집에 대해 통화했다. 선생님은 코로나19로 대면 인터뷰는 부담스러우니 상황이 정리되면 보자고 하셨다. ‘사랑과 기도의 시인’으로 불리는 시단의 어른에게서 어떤 지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코로나19가 빨리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이유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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