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연수 (3) “나를 밟고 가라” 부모 만류에도 수녀 되려 서울로

천주교 미션스쿨 다니며 수녀 동경… 식구들 공주교대 가기 원했지만 학교에서 원하는 수도사대 입학키로

김연수 사모(왼쪽)가 쌘뽈여고 2학년 시절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함께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어울렸던 이 친구와 같은 날 세례도 받았다.

내가 다닌 쌘뽈여고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주교 미션스쿨이다.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도회 소속으로 당시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최신식 학교였다. 입학 축하 미사부터 전혀 생소한 종교의식에 어리둥절했지만, 까만 원피스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머리에는 검은 베일을 쓴 수녀님의 모습에 왠지 모를 동경과 설렘에 가슴이 뛰었다. 여고 생활은 인생의 또 다른 길에 눈을 뜨게 했다.

그 무렵 나는 사색에 빠져있었다. 큰오빠 집에는 책이 많았는데 하교 후 3살이던 조카랑 놀아주는 일과 그림 그리는 일을 제외하면 늘 책 속에 파묻혀 지냈다. 특히 인생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 당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 문장이었다. “한 자밖에 안 되는 촛불 같은 인생, 캄캄한 밤에 켠다면 많은 사람에게 빛이 될 텐데.” 나는 수도 생활이야말로 한밤중에 켜는 초와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개교기념일인 성바오로 축일에 큰오빠와 함께 세례를 받으면서 그 마음은 더 커졌다. 1년 뒤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70년 1월 대학입학 시험을 이틀 앞둔 날 오후였다. 쌘뽈여고 교장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큰오빠가 날 찾는 전화였다. 쌘뽈여고 국어교사였던 큰오빠는 내가 고3 되던 해 공주사대부고로 전출 갔다. “공주 오빤데, 바꿔줄까” 물으시는 교장수녀님께 나는 “그냥 모른다고 해주세요. 지금 전화 받으면 서울로 시험 보러 못가요. 조금 전에 여기서 떠난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날 아침 나는 부모님께 공주로 가겠다고 인사드리고 집을 떠났다. 그리고는 곧바로 목적지를 서울로 바꿨다. 아침 일찍 공주로 가겠다고 떠난 내가 저녁이 다 돼도 도착하지 않자 큰오빠가 급히 전화를 건 것이다. 집에선 내가 공주교대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학교에서 원하는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으로 향해 있었다. 당시 학교는 4회 졸업생인 내가 서울로 진학하길 바랐다.

“연수야, 너 들르면 꼭 공주로 연락하라고 하신다. 연락 안 하면 형제 인연을 끊겠다고 하시는데….” 교장수녀님의 걱정스런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이튿날 이른 아침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소서.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부모님과 오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일 주님의 은혜로 합격한다면 저를 수도 생활로 부르시는 것으로 알고 따르겠습니다.’

그해 2월 “서울 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는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나는 뒷문을 열고 수도사대 입학을 위해 집을 나섰다. 언제 따라왔는지 동생이 손을 내밀었다. “언니, 이거라도 갖고 가.” 도망치듯 나선 언니가 안쓰러웠는지 꼬깃꼬깃 접힌 1000원짜리 지폐 2장을 내 손에 꼭 쥐여줬다.

‘세상 모든 출가자가 너나없이 한 번은 가족과 아프게 이별했을 거야.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지금 떠나자. 한 번은 겪을 일이야.’ 눈에 고인 눈물을 털어내며 서울행 버스에 올라탔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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