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연수 (4) 같이 살자며 붙잡는 조카 떼놓고 수녀원으로

대학 자퇴하고 수녀 수련생 준비 중 큰오빠 부음 듣고 공주로 내려가, 올케와 업어키운 조카 보니 눈물이…

2015년 큰조카 용정이 내외(양쪽 끝)와 찍은 사진. 당시 서울북부지검 부장검사였던 큰조카가 검찰청 사람들과 함께 서울 동대문구 밥퍼운동본부에 봉사활동을 왔었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 나는 수녀원의 청원자가 됐다. 공부보다 수녀 되기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청원자로 4년을 살기가 힘들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자퇴서를 냈다. 이유를 묻는 교수님들께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곧바로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께선 중증의 종교병에 걸렸다며 혀를 끌끌 차셨다.

이 무렵 나는 큰오빠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수녀 수련생이 될 준비를 모두 마친 1971년 겨울 큰오빠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얼마 후 올케언니와 조카 셋을 남긴 채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32세였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이튿날 해가 뜨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현실부정이었다. 긴 여행을 가는데 의자 등받이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큰아들을 잃은 부모님의 상실감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큰오빠는 내게 항상 힘이 돼주던 든든한 멘토였다. 어릴 적 막내 여동생 응석에 좋은 건 모두 막내 여동생 차지가 될 때 큰오빠는 늘 내 몫을 챙겨 줬다. 용돈을 받아도 그중 얼마를 떼어내 꼭 내게 줬다. 그런 모습에 막내 여동생은 “큰오빠는 언니 오빠, 작은 오빠는 내 오빠”라 부르기도 했다. 오빠 무릎에 앉아 그 시절 유행하던 노래를 따라 불렀고,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함께 별을 보기도 했다. 큰오빠는 쌘뽈여고 시절엔 하숙집 주인이었고, 우리 학교 고전문학 선생님이었다. 세례도 함께 받았다. 큰오빠가 공주로 이사한 뒤에도 나는 방학 때마다 큰오빠 집을 찾아 조카들과 놀곤 했다.

오빠 소식을 듣고 공주로 내려가는 그 길이 어찌나 깜깜하던지…. 공주에 도착해, 지금은 변호사가 된 큰조카 용정이를 만났다. 용정이는 대뜸 날 끌어안더니 “이제 고모가 우리랑 같이 살아”라고 말했다. 큰오빠 집에서 하숙할 때 내가 말을 가르치고 업어 키웠던 조카였다. 큰오빠가 교사로 있는 공주사대부고 소속 초등학교에 합격해 새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조카의 그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큰오빠의 자리를 대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아이 셋을 홀로 키울 올케언니를 도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도 그걸 바라는 눈치였다. 마침 자퇴도 했겠다 고민이 깊어졌다. 수련생이 되겠다는 마음도 조금 흔들렸다. 날 위로하러 내려온 수련장(수도원 수련생을 관리하는 분)님께 이 사실을 털어놨다. 수련장님은 같이 성당에 가서 기도하자고 했다. 나는 ‘하나님 원하시는 걸 수련장님 통해서 알려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얼마나 기도했을까. 기도를 마치고 나온 나에게 수련장님은 “연수 네가 조카를 돌보는 게 잘 돌보겠니, 아니면 하나님께서 잘 돌보시겠니”라고 물었다. “하나님이요”라고 대답했다. 돌아온 말은 “그럼 수녀원으로 가자”였다. 나는 눈물을 글썽이는 조카를 떼어놓고 돌아섰다. 흡사 자식을 떼놓고 가는 기분이었다. 조카들에게 미안했는지 나는 수련생활을 하면서도 옛날이야기를 써서 보내곤 했다. 다행히 조카들은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잘 자랐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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