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의 직업은 기자다. 10년 넘게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하며 타인의 삶을 관찰했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존재인 부모의 삶엔 무관심했다. 이상할 건 없다. 늘 곁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소홀해지는 건 우리네 삶에 비일비재한 일이니까. 아들은 부모님의 인생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고 지난달 19일 아버지와 함께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 갔다. 일방적으로 질문하는 것보단 대화 형식이 좋을 것 같아 다양한 질문이 적힌 대화 카드를 미리 준비했다. 아버지는 이런 대화가 어색했던지 질문을 아들 혼자 다 하긴 했지만. 난 그들의 동의를 구하고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하며 관찰했다. 아들이 가장 먼저 고른 대화 카드는 이거였다. “죽을 때 한 가지 기억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어떤 기억을 가지고 갈 건가요?”

“그때가 몇 년 전이더라. 3년? 4년? 우리 제주도 갔을 때 기억나니?” 아버지는 답변을 미리 준비해뒀던 것처럼 질문이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밤새 이야기하고, 다음 날 숲길 걸으면서 또 대화하고 그랬었잖아. 만약 내가 죽기 전 병상에 누워있다가도 아, 그때 그 순간은 정말 행복했었지,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아.”

아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평생 살면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한 가지가 이런 사소한 추억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듯했다. 대화 카드엔 구체적인 상황을 묻는 말들이 많았다. 아들의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끼는?” 아버지는 다시 제주도에서의 추억을 떠올렸다. “우리 제주도 갔을 때 괜찮은 식당 못 찾아서 편의점 도시락 사서 바닷가에서 먹었던 적 있잖아. 제주도까지 가서 뭐 그런 걸 먹느냐고 혼날까봐 엄마한텐 비밀로 하자고 했었는데 그때가 생각나네.”

카페 창밖엔 가냘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혼자 책 한 권 들고 기차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어렵지 않잖아요. 그냥 떠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들이 묻자 아버지는 그게 맘처럼 잘 안 되더라고 했다. “네 엄마 빼고 혼자 어딜 떠나면 집에서 뭔가 억눌려 있어서 해방되고 싶은 사람처럼 보일까봐 걱정되더라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항상 주변 시선을 신경 쓰던 게 몸에 배어버린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살았지만 아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넨 한 가지 조언은 이거였다. “난 내가 다른 사람의 맘을 아프게 했다는 생각이 들면 며칠 동안 고민을 했어. 남을 의식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한 가지 말해주고 싶은 건, 누군가 네 삶을 대신 살아줄 순 없다는 거. 네 삶은 너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결정은 너를 위해 해야 한다.”

‘현재 가장 큰 걱정’ ‘가장 행복했던 순간’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용서받고 싶은 기억’ 등 평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둘은 실컷 했다. 모든 순간이 인상적이었지만 딱 하나를 꼽자면 아들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이었다. “아버지, 당신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위로는 뭘까요?”

“나를 완벽히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살다 보면 가슴 아픈 일이 많은데 나 스스로 때문에 마음 아플 때가 많더라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위로를 해주더라도 결국엔 내가 나를 안아주고 내가 나를 위해줘야 하는 것 같아.” 아버지는 외로워 보였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꼭 안아줬다. 대화 내내 어색해하던 아버지는 대화가 끝나자 아들에게 자주 이렇게 얘기하면 좋겠다고 했다.

문학가 김수영의 시 ‘나의 가족’엔 이런 대목이 있다.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정의에 대해 수없이 절규했던 김수영도 가족의 애틋함을 노래했다. 아무리 낡고 오래돼도 좋은 것은 가족의 사랑뿐이라고.

인류를 사랑하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 사랑하기가 더 어렵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언제 종식될지, 21대 국회는 어떻게 돌아갈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세상은 떠들썩하지만 결국 개인의 삶에서는 가족이 더 중요한 화두다. 항상 곁에 있기 때문에 소중한 걸 잊고 살진 않았는지. 어제가 어버이날이었다. 오늘이라도 가족에게 사랑을 표현하면 어떨까.

이용상 뉴미디어팀장 sotong203@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