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경제학은 ‘단언’하지 않는다

[책과 길]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경제학을 떠올리면 저 사진처럼 난수표처럼 느껴지는 숫자들과 이해하기 힘든 그래프부터 떠올리게 되는데, 엄밀하게 이뤄질 법한 경제학적 판단은 사실 엉터리일 때가 많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쓴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을 읽으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들은 “현대의 가장 훌륭한 경제학자들이 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결론만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한 과정까지 아울러 보여주고자 한다”고 적었다. 픽사베이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아비지트 배너지·에스테르 뒤플로 지음/김승진 옮김, 생각의힘, 648쪽, 2만7000원

여기, 두 사람이 있다. 수소폭탄 개발에 가담한 폴란드 출신 물리학자 스타니스와프 울람과,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중 한 명인 폴 새뮤얼슨이다. 울람은 평소 경제학자를 낮잡아봤다. 그는 새뮤얼슨에게 다음의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고 새뮤얼슨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사회과학 전체 중에서 진리이되 뻔하지 않은 정리를 하나만 말해 보라.”

“비교 우위론이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참이라는 것은 이견을 다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비교 우위론은 각 나라가 상대적으로 더 잘하는 일에 특화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비교 우위론에 따르면 무역은 당사국 모두에 이문을 남긴다. “경제학 학위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는 무역이 많이 이루어질수록 좋은 일이라는 개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경제학을 전공했다면 누구나 들어봤을 ‘스톨퍼-새뮤얼슨 정리’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시장을 개방하면 저숙련 노동력이 풍부한 개발도상국에선 임금이 오르고 불평등 수준도 누그러진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실일까.

‘좋은 경제학’을 꿈꾸다

경제학자들이 퍼뜨린 저런 통념을 결딴내버리는 사례는 지구촌 곳곳에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1985~2000년 멕시코 콜롬비아 브라질 인도 칠레 등은 관세를 낮추면서 무역 시장을 개방했는데, 이들 국가에선 불평등 문제가 되레 심각해졌다. 이런 사례를 늘어놓으면서,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비교 우위론에서는 인간이 좋은 일자리나 돈을 좇아 이동한다고 가정한 뒤 계산이 이뤄진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불가능할 정도의 재난 상황이 아닌 한” 보금자리를 지킨다. A라는 도시의 산업 기반이 무너지면, 다른 산업이 활기를 띠는 도시 B로 이동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기본 가정부터 틀리니 이어지는 해법도 별무소용일 때가 많다. 저자들은 “교역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며 “교역과 관련된 주된 문제는, 스톨퍼-새뮤얼슨 정리가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패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법은 새로운 일자리로 옮겨 가는 것을 도움으로써 패자의 수를 줄이거나 그들에게 손실을 더 잘 보상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핵심은, 변화해야만 하는 것, 이동해야만 하는 것, 좋은 삶과 좋은 일자리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버려야만 하는 것이 일으키는 고통에 눈감지 말고 그것을 더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든 시대를…’엔 다소 어렵게 느껴지지만 새롭게 경제학의 세계를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가 빽빽하게 실려 있다. 우선 저자들이 누구인지부터 보자.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MIT) 교수인 아비지트 배너지(59)와 에스테르 뒤플로(48)는 부부 경제학자로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한국 독자에겐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의 저자들로도 유명하다. 빈곤 퇴치를 다루는 개발경제학을 대표하는 학자들로 통한다. 지난해 노벨위원회는 노벨상 수상자로 이들을 선정하면서 “실험 기반 접근법을 통해 개발경제학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평가했다.

‘힘든 시대를…’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유의미한 단어는 ‘실증(實證)’이다. 세상을 제대로 분석하려면 자명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실증 근거를 들이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제목에도 담긴 ‘좋은 경제학’과도 연결된다. 좋은 경제학은 단언하지 않는 경제학이다. 언제나 신중하게 실증에 나서야 한다. 저자들은 “경제학자가 대중과 소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결론 자체가 아니라 그 결론까지 도달하기 위해 밟은 경로”라고 강조해놓았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내용은 무역 문제, 조세 이슈, 정부 역할을 둘러싼 논쟁 등 온갖 분야를 넘나든다. 그중 성장 이슈를 다룬 챕터부터 개괄하자면 이렇다.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고든은 1973년을 기점으로 세계의 경제 성장은 “종말을 고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실제로 그때부터 성장세는 둔화됐다. 세계 경제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지 누구도 답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두 저자는 한국과 중국을 예로 들면서 “당장의 절박한 처지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것을 조언한다. 예컨대 과거의 한국처럼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영속적인 고도성장에 불을 댕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후생을 크게 향상시킬 수는 있을 것”이라는 거다.

“정책의 세계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후생에 분명하게 초점을 맞추는 정책을 펴는 것이 부유한 나라의 성장률을 2%에서 2.3%로 끌어올릴 수 있는 조리법을 찾는 것보다 수백만명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가능성이 훨씬 크리라는 점이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존엄”

‘힘든 시대를…’은 느리게 읽히는 책이다. 600페이지를 넘는 묵직한 두께도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두 저자의 사려 깊고 친절한 태도 덕분에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우리는 경제 사안을 다루지만,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더 큰 개념이 언제나 우리 작업의 지침”이라고 말한다. “더 나은 대화를 할 수 있으려면, 존엄과 유대를 향한 인간의 깊은 열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도 적어놓았다. 경제학 책에서 이런 메시지를 전하려는 저자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책을 구성하는 9개 챕터에서 가장 번뜩이는 내용은 마지막 챕터 ‘돈과 존엄’에 등장한다. 기본소득 이슈를 다루면서 돈을 뛰어넘는 존엄의 가치, 일자리가 선사하는 자존감의 문제를 깊숙하게 파고든 내용이다. 두 저자는 “오늘날 같은 변화와 불안의 시기에, 사회 정책의 목적은 충격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하게 되지 않으면서 충격을 흡수할 수 있게 돕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책을 읽고 나면 무지를 인정하고, 직관을 뛰어넘으려 애쓰고, 타성을 타파하려고 노력하는 ‘좋은 경제학’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힘든 시대를…’의 끄트머리에 이르면 작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저자들은 이런 문장으로 책을 끝맺는다.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세상, 더 제정신인 세상, 더 인간적인 세상을 원한다. 경제학자들에게만 맡겨두기에, 경제학은 너무 중요하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