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개봉한 영화 ‘슈팅걸스’의 한 장면. 여자축구를 주제로 한 국내 최초의 장편 상업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삼례여중 축구부는 지난 3월 해체됐다. 영화사 그램 제공

선수가 13명뿐인 시골 중학교 축구팀이 있다. 의욕을 잃은 감독과 패배가 익숙한 아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몇차례 우여곡절 끝에 서로 마음을 열고, 발을 맞추고, 강팀이 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흔히 상상할 법한 스포츠 영화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면 이야기는 좀 다른 모습이 된다. 겨뤄야 할 대상이 상대팀 뿐만이 아닌, 공을 즐겁게 찰 수 없도록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6일 개봉한 국내 최초의 여자축구 영화 ‘슈팅걸스’는 2009년 전국 여왕기 대회에 출전해 돌풍을 일으킨 전북 완주 삼례여중의 실화가 바탕이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 영화 속 삼례여중 축구부는 세상에 없다. 올 초 삼례여중이 인근 학교와 통폐합 되면서 선수 생활을 하기 힘든 환경으로 바뀌게 됐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은 처음 항의 차원에서 ‘해체 결의문’을 써서 축구부 운영 의지가 없던 학교에 제출했고, 이후 학부모와 학교 측의 감정싸움이 깊어지면서 해체 결의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매일같이 공만 보며 내달리던 아이들 중 몇몇은 어른들이 내린 결정 때문에 축구화를 벗어야 했다. 다른 아이들은 공을 찰 수 있는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올해 한국 여자축구는 역대 최초의 성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탓에 미뤄진 중국과의 최종예선 플레이오프에서 이기면 사상 최초로 올림픽 진출에 성공한다. 대한민국 축구사에서 첫 세계대회 우승이었던 2010년 17세 여자월드컵 우승, 같은해 19세 여자월드컵 3위, 2015년 여자월드컵 16강 진출 등 성과에 이은 금자탑이다. 그러나 막상 여자축구계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유소년 축구는 바닥부터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 세심한 배려가 없는 정부의 정책은 이런 상황을 개선시키기는커녕 부채질 하고 있다.

축구공을 뺏긴 소녀들

삼례여중의 사례는 최근 몇 년새 여자축구계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의 단편이다. 대학 여자축구의 명문 한양여대는 1993년 창단 이래 각종 전국대회에서만 13회 정상에 올랐지만 지난해 12월 31일을 끝으로 해체됐다. 현재 국가대표팀에서 맹활약 중인 공격수 지소연, 수비수 임선주와 서현숙, 미드필더 이영주 등 전·현직 대표팀 선수도 여럿 배출했지만 대학 측에게는 팀을 유지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삼례여중과 한양여대뿐 아니라 지난해 12월부터 현재까지 불과 5~6개월 사이 해체된 팀만 해도 제주여고와 광주운남고를 합쳐 4개팀에 이른다.


전국의 초·중·고·대 여자축구부는 2013년 말까지만 해도 70개였으나 현재는 53개까지 줄었다. 6~7년 새 4분의 1이 줄어든 셈이다. 한 여자축구계 인사는 “현재 있는 팀들도 최소 절반 정도는 존폐 위기에 처해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여자대표팀 최초 여자월드컵 진출을 이끌었던 인천 현대제철 소속 김정미 골키퍼는 “어릴 적 축구를 했던 고교와 대학 팀이 모두 사라져서 속상한 마음”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같은 구단 소속인 대표팀 주전 미드필더 이민아도 “매년 WK리그 드래프트에 올라오는 후배들의 수가 줄어드는 게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다.

강원도 유일의 고교 여자축구팀 화천정산고는 지난해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가 마지막일 뻔했다. 예산을 명분으로 학교 측이 해체를 밀어붙이는 와중에 선수들은 어떻게든 이를 막으려 제대로 된 연습경기조차 없이 대회를 준비했다. 이 악물고 얻어낸 우승컵을 보며 선수들은 서럽게 울었다. 우승 직후 선수단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움직였고, 여자축구계도 교육당국과 지자체, 학교를 설득하려 움직인 끝에 가까스로 해체를 막아냈다. 구도(球都)로 불릴만큼 축구 인기가 높은 강원도지만 이곳에선 이미 초·중·고 통틀어 전국 최초 여자축구팀이던 강일여고 여자축구부가 2016년 해체됐다.

대한민국 여자축구대표팀이 지난 2월 제주 서귀포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베트남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고 기뻐하는 모습. 연합뉴스

배려없는 정책에…뿌리 흔들리는 여자축구

정부 정책은 축구를 하려는 여자아이들에게 오히려 독이다. 애초에 남자축구와 저변이 비교되지 않는 여자축구에 동일 정책을 적용하는 바람에 그나마 있던 곳마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서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초·중등 선수들 합숙을 금지한 것부터 결정적이었다. 대표팀 주축멤버로도 뛰었던 김유미 화천정산고 감독은 “여자축구부를 갖춘 학교가 지자체에 하나 있을까말까하기 때문에 딸에게 축구를 시키려면 가정 전체가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선수 수급이 안되니 기존 여자축구부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한 여자축구계 인사는 “오히려 십수년 전보다 선수 수급이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올해부터 적용되는 수업인정일수 축소 역시 여자축구에는 큰 타격이다. 이는 학교 운동부 소속 선수가 대회에 나가 수업에 결석하더라도 출석으로 인정해주는 날을 뜻한다. 초등학교 20일, 중학교 30일, 고등학교 40일 수준으로 인정 일수가 줄면서 참가 가능한 대회 자체가 줄었다. 한 대회당 짧게는 일주일에서 열흘 가까이 대회장소에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로 방학 일정이 제각각이라 의무 참가대회인 전국체전을 학기 중에 참가해야 해 선택폭이 더 좁아졌다. 그렇잖아도 적은 참가팀 수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부가 생활체육 전환을 위해 실시한 주말리그도 여자축구에서는 성립이 불가능한 안이다. 인근에 다른 팀이 없는 상황에서 주말마다 멀리 나가 원정 경기를 하려면 매번 최소 200~300만원을 써야 한다. 그렇잖아도 예산이 적은 여자축구부에는 언감생심이다. 영화 속 삼례여중의 우승멤버였던 이유라 인천 디자인고 코치는 “정책 자체가 남자축구만 고려해서 만들어질 뿐 여자축구계 사정은 아예 논의에서 배제를 하니 벌어지는 결과”라고 꼬집었다.

현장 지도자들은 여자축구가 과거 체제로 돌아가는 건 선택지가 아니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현실을 고려한 세심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청조 인천 가정여중 감독은 “한 학교에서 운영하는 축구부에 인근 다른 학교 선수들이 활동할 수 있는 ‘클럽 축구’ 체제로 전환하는 것도 방안”이라면서 “투자만 가능하다면 프로·실업 구단에서 선수를 육성하도록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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