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검사를 처방하려 하자 환아의 어머니가 말했다. “제 시간을 써야 할 텐데, 검사의 필요성을 좀 설명해 주세요.”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도 없을 뿐더러, 그런 요청을 들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순간 지극히 합리적이며 당연한 요구이지 싶었다. ‘나뿐 아니라 아이의 시간도, 의사의 시간도 모두 중요하다’라는 그분의 태도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더하다 덜하다 할 것 없이 현대인은 바쁨이 미덕인 듯 살아간다. “바쁘지?”라는 말이 인사말이 되는 시대이니 오죽할까. 그럼에도 우리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인정과, 그 소중한 시간을 사용하는 이유와 가치를 알려달라는 요구는 매우 당연하면서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과연 나도 “별거 아닌데, 이것 좀 해줘”라는 말들로부터 내 소중한 시간을 보호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재능기부’라는 말이 숨기고 있는 무례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을까?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서는 노는 시간을 줄여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을 은행에 저축하라며 사람들을 설득하는 회색신사들이 나온다. 소설 속 사람들은 자투리 시간이 돈이 된다는 점에 열광하지만, 스스로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결국 추억과 여유, 인간다움을 모두 잃어간다.

최근 모 대형 학원의 신규 강사 채용에서 밝힌 인재상이 ‘돈과 일 욕심 많은 사람’이라는 말에 말문이 막힌 적이 있다. 학창 시절 ‘모모’를 읽을 때는 기발한 상상력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겼는데, 어느새 우리 사회가 ‘돈과 일 욕심’으로 시간과 건강을 갈아 넣는, 결국 회색신사들에게 시간을 ‘저축’한다며 빼앗기는 사람들의 시대가 된 것은 아닌가 싶어 섬뜩했던 것이다. 그 어머니처럼 시간의 소중함을 서로 존중해 준다면 우리 사회가 그런 섬뜩한 방향으로 밀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회색신사들로부터 거리를 지키고 나와 남의 시간을 소중히 대하고 있는지부터 한번 돌아봐야겠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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