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연수 (13) 남편의 ‘대책없음’은 하나님의 ‘대책’이었나

가족 부양 않고 빈민선교 고집하는 남편, 직장까지 정리하며 무언의 경고 했지만 단독목회의 길

김연수 사모의 남편 최일도 목사가 개척한 다일공동체교회 초기 모습. 최 목사는 1989년 서울 청량리 뒷골목, 588홍등가 주변 폐업한 인쇄소 사무실을 빌려 교회를 세웠다.

예수원에서 돌아온 후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그런데 남편이 가끔 어디로 사라지고 밖에서 돈을 쓰고 오는 일은 그치지 않았다. 나는 벼르고 벼르다 어느 날 남편을 따라나섰다.

그는 날 청량리의 한 설렁탕집으로 데려갔다. 거기엔 집 없는 노인들 몇 분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앉아 있었다. 남편은 익숙한 듯 곧바로 계산대로 가 그들의 밥값을 계산했다. 이어 그들과 몇 마디 나누더니 다시 가게를 나왔다. “여보 봤지? 요즘 내가 밖에서 하는 일이야. 궁금히 여기는 돈도 이렇게 썼고.”

여우를 피해 범을 만난다더니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설마 계속할 건 아니죠.” 집에 도착하자마자 매몰차게 말했다. 남편은 “뭐, 봐가면서…”라며 얼버무렸다. 속이 탔다. 나는 그날부터 남편을 ‘대책 없음’이라 불렀다. 돌이켜보면 남편의 대책 없음은 하나님의 대책(大策)이었다. 그러나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직장을 정리했다. 가족들 생계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남편이 그 일을 그만둘 거로 생각했다. 퇴직금과 그동안 모은 돈으로 조그만 차를 한 대 샀다. 곧 졸업하는 남편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앞으로 집안 살림 이끌어 가려면 바쁠 테니까 신발 바꿔 신고 열심히 뛰어 달라는 일종의 주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빈민선교는 이제 끝내야 한다는 단호한 경고의 의미이기도 했다.

난 남편이 신학교만 졸업하면 큰 교회 전임전도사로 부임해 가계를 책임져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남편은 졸업 후 어떤 교회로도 부임하지 않았다. 이렇다 할 생계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통장 잔고가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7살, 5살 두 아이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하는 수 없이 전에 하던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기독교서회에서 리메이크하는 책들을 받아다 원고를 다시 쓰기도 하고, 번역 원고들의 윤문 및 문법 교정을 시작했다. 원고 한 장당 500원짜리였다. 나는 매일 원고를 썼다. 살림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하루 150장까지 쓸 때도 있었다. 이렇게 몇 달을 살자 오른손 엄지손가락 인대가 늘어났다. 그래도 책 한 권을 마치면 30만~40만원 정도 수입이 들어왔다.

손에 붕대를 감고 원고를 쓰는 내 모습을 본 남편은 마지못해 집 근처 교회에 전임전도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불과 3달을 못 넘기고 그만뒀다. 얼마 뒤 다일공동체교회를 개척했다. 1989년 9월 10일 다일공동체와 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남편의 대책 없는 행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이 신학생이었던 시절, 나는 힘들 때마다 남편이 목사가 돼 교회에 부임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힘을 내곤 했다. 그만큼 손꼽아 기다려온 날이었지만, 도무지 즐겁지가 않았다. 남편은 내 기대와 달리 청량리 뒷골목, 그것도 588 홍등가 주변 폐업한 인쇄소 사무실을 빌려 단독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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