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光化門) 현판을 훈민정음체로’라는 시민모임(공동대표 강병인·한재준, 이하 시민모임)이 결성돼 최근 보도자료를 보내왔다. 주장을 종합하면 이렇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역사적 가치가 높으면서 ‘광장’이라는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한국의 얼굴이다. 그 광화문 현판이 한자(漢字)로 된 걸 보면 외국인은 한국이 아직도 한자로 생활하는 중국의 속국이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니 현판 글씨를 한글로 바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자. 글꼴은 이왕이면 세종대왕이 경복궁에서 창제한 한글 서체인 훈민정음체로 하자. 모든 백성이 평등하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제작했다는 창제 배경은 시민 광장인 광화문의 정체성에도 부합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민모임 주장에 반대한다. 세종대왕의 탁월한 리더십, 한글의 우수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한글은 21세기 들어서도 과학적 체계와 사용의 간편성을 평가받아 2개국에 수출된 대표 문화 상품 아닌가. 그럼에도 한글 교체에 반대하는 것은 만약 실행됐을 경우 집단 무의식에 끼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통에 대한 경시로 이어질까 두렵다. 원로 국문학자 정광씨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한자의 수용은 위만조선 시대부터 진행됐다. 우리의 정신문화는 한자로 기록된 시기가 더 길다. 그럼에도 교육 현장에선 한자 의무교육이 폐지됐다. 고대사는 물론 조선시대 연구 인력도 줄고 있고 근대기에만 연구자들이 몰리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한자 의무교육 세대가 물러나면 국한문을 혼용했던 일제강점기 연구 인력조차 사라질 판이다.

‘춘향전’에 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조선학과(한국학과)를 졸업한 러시아 출신 박노자씨가 한자를 배우고 삼국시대 연구로 박사 논문을 썼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렇게 외국인에게 한국학은 한글은 물론 한자까지 포함하는 영역이다.

미래의 지적 자산도 풍성해질 수 있다. 우리말은 최소 70% 이상이 한자어로 구성됐다. 한자를 알면 정확하게 개념을 알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는 단어가 된 ‘택배’는 한자로 만든 신조어가 아닌가. 우리말을 갈고 닦으면서 한자에 대한 이해도를 제고하는, 투 트랙의 노력이 필요하다.

외국인이 한자 현판을 보고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 안의 뿌리 깊은 콤플렉스의 발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향을 받는 것은 자연스럽다. 유럽 문명의 젖줄이라는 고대 그리스 문명도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쇄국을 고집한 결과가 대한제국의 몰락이 아니었던가.

한글도 중국 글자의 네모꼴 모양과 티베트 승려들의 문자 또는 몽고 문자의 알파벳 원리에서 자극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평가한다. 언어학자 간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글이 하늘 아래 뚝 떨어진 문자가 아니라는 점은 맞는다. 독창성도 다른 문화의 수용 위에서 피어난다.

우리의 문화적 자존감은 광화문에 내걸리는 한글 현판 하나로 회복될 일은 아니다.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영역에 걸친 총체적 역량이 올라갈 때 가능하다. 이번에 ‘K방역’ 효과로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올라갔다. 이것이 한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높일 공산이 더 크다.

가장 우려되는 건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훼손이다. 광화문은 3년8개월에 걸친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일반에 공개됐다. 문화재 복원 원칙에 따라 고종 때 중건 당시 모습을 준거로 삼았다. 현판 역시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한자 글씨를 따랐다. 현판은 안타깝게도 몇 달 뒤 균열이 생기면서 재제작이 결정됐다. 그때 한글 현판 교체 주장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문화재청이 10여 차례 공청회와 토론회를 했고, 그 결과 한자 우세로 결론이 난 사안이다. 민주적 절차 끝에 나온 결론을 흔드는 것은 광화문이 상징하는 광장 정신, 즉 민주주의에도 맞지 않는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