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가 1516년 ‘유토피아(Utopia)’라는 책을 출간한 이래로 이 단어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적 사회를 가리키는 의미로 널리 사용됐다. 이 단어는 ‘없다’라는 뜻의 접두어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가 결합해 생긴 것으로 문자적인 뜻은 ‘없는 곳’이다. 유토피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종종 사용되는 단어는 디스토피아(dystopia)인데, 여기서는 접두어로 ‘나쁘다’라는 뜻을 가진 ‘dys-’가 활용됐다. 그런데 누가 보더라도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의 반대말로 여기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개념이 ‘eutopia’이다. 이 단어는 ‘좋다’라는 뜻이 있는 ‘eu’가 접두어로 사용돼 ‘좋은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Eutopia는 Utopia와 달리 지상에서 실현 가능한 이상적 사회를 말한다. 오늘날 유토피아에 관한 수많은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어들을 구별하고 그 관계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토피아에 관한 얘기를 할 때 꼭 언급되는 것이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이다. 죄와 악이 들어오지 않고 죽음과 고통이 없는 에덴이야말로 이상적 사회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존 밀턴은 ‘실낙원’에서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 문제가 있었음을 제기한다. ‘실낙원’에 따르면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날 아침에 하와가 아담에게 그날은 둘이 따로 떨어져서 일을 하자고 제안한다. 아담은 천사로부터 들은 경고에 의하면 교활한 사탄이 지금 인간을 타락시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하와는 이렇게 좁은 지역에 살면서 늘 적의 위협을 느끼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행복이냐고 반문하면서 그렇다면 ‘에덴은 에덴이 아니리다!’라고 선언한다. 아담은 논리적으로 하와를 이길 수 없어서 결국 두 사람은 따로 일을 나가게 되고, 그것이 타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밀턴이 상상력으로 복원한 에덴동산은 아담에게는 지상낙원이었을지 모르지만, 하와에겐 그렇지 않았다. 하와는 아담 때문에 늘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그와 떨어져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자유가 제한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일한 세계에서 어떤 사람은 그곳을 유토피아라고 느끼고 다른 사람은 디스토피아라고 느끼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실낙원’은 밀턴이 성서의 내용을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풀어낸 작품이므로 여기에서 어떤 교리적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부쩍 늘어나고 있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에 관련된 논의를 생각할 때 밀턴의 통찰력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다.

오랫동안 유토피아라는 말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의 가상적 설계도 역할을 했다. 이런 유토피아는 문학 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했지만 어떤 집단이나, 이념, 국가, 문명이 추구하는 목표로 제시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유토피아는 항상 전체주의적 유혹에 취약했다. 디스토피아 담론은 단순히 인류가 미래에 겪을 일반적 재난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멋진 신세계’나 ‘1984’에서 보듯 유토피아라는 포장 이면에 숨겨진 모순을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 앞에는 이렇게 허황되고 조작된 미래를 받아들이거나 그런 미래의 도래에 대해 저항하는 선택밖에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이 유토피아(Eutopia)에 있지 않을까? 이상적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변화를 이뤄가는 것이 그것이다. Eutopia로 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밀턴이 지적한 대로 내가 유토피아라고 느끼는 상황에 대해 누군가는 디스토피아라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대성 연세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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