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오른쪽 위 ‘임꺽정’부터 ‘일지매’ ‘초한지’ ‘삼국지’ 캐릭터 컷(시계 반대 방향으로). 필자 제공

프랑스대혁명 이후 공화정이 시작되던 프랑스는 왕정 때 못지않은 혼란이 불거졌다. 새로운 통치세력 및 정치계급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민중들의 삶은 더 나아지기보단 여전히 피폐하기만 했다. 그러한 일상을 기록하던 화가가 있었다. 19세기 초중반을 불꽃처럼 살아낸 오노레 도미에는 세상을 풍자하고 기록하며, 그림만으로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정치적 카툰의 시작이었고, 회화를 넘어 예술이 지켜야 할 시대의 이야기와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받으며 화가보다는 풍자만화가로 후세에 알려졌다. 그의 작품에서도 나타나듯, 만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해학과 풍자다. 또 그러한 장치를 통해 통쾌하게 공감시키는 비평의 날카로움이다.

호쾌한 사나이, ‘임꺽정’

한국만화는 1950년대 말 만화방 시대로 시작되면서 아동들이 보는 계몽 목적의 준공공재 수준 그림책이었고, 특히 1960~70년대를 지나며 군사정권으로부터 항상 감시당하는 교육용 미디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렇게 정체되고 한정되던 만화를 긴 잠에서 깨게 한 ‘천재’가 있었다.

그의 시도는 계몽적이지도 않았고, 교육적이거나 점잖지도 않았다. 독설과 비유, 성적 농담과 언어유희, 자기도취와 역사 왜곡 등 그가 대사와 연출에서 보여주는 시도는 말 그대로 ‘처음 만나는 만화’였고, 지면 또한 만화방이 아닌 일간지 스포츠신문이었다. 초등학교 이후 만화책을 보면 어른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성인들은 신문에서 매일 만나는 그의 만화에서 본인이 성인이라는 자존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1972년 고우영(사진)의 ‘임꺽정’은 그렇게 일간스포츠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당시 일간스포츠를 발행하던 한국일보사에서도 일간신문에 이런 만화를 연재하는 것에 대해서 반발과 저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사주였던 장기영 대표에 의해 ‘소년한국일보’를 중심으로 만화사업부가 창설됐다. 40여명의 만화가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던 한국일보사는 한국 최초로 스포츠연예신문 ‘일간스포츠’를 창간하며, 신예 만화가 고우영에게 대담한 작품을 맡긴다. 이미 소년잡지 ‘새소년’에서 가라테 영웅 최영의를 주인공으로 한 ‘대야망’을 연재하던 젊은 만화가 고우영은 당시 국내 만화방의 독점적 유통망이었던 합동 출판사의 막강한 통제력에 반발하며 일간스포츠 연재를 감행한다.

시작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젊은 패기였고, ‘임꺽정’의 캐릭터 역시 한 시대의 무소불위 권력과 싸우던 속칭 도적왕 이야기였다. 위험한 주제와 지적받을 캐릭터였지만, 그가 표현하는 대사의 가벼움은 지적 유머로 평가되었고, 이후 시대를 뛰어넘는 기막힌 발상과 연출의 호쾌함은 성인만이 이해해낼 수 있는 문학적 지평으로까지 회자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고우영은 만화라는 미디어를 전혀 다른 해석의 관점과 성인들의 차별화된 비평문화로 격상시키며 중국 고전들을 한편씩 해부하는 또 다른 도전에 돌입한다. 그 시작은 ‘수호지’였고, 연이은 도둑 3부작 ‘일지매’까지의 연재 성공은 그에게 있어서 쉴 수 없는 작품연재의 시작을 알렸다. 삼국지, 수호지, 열국지, 초한지, 금병매 등의 중국 고전소설을 자신만의 언어와 그림으로 그리며, 스포츠신문 마니아층을 형성했고 이후 일지매, 가루지기 등 우리 전통 설화 캐릭터들을 발굴해 넉살 좋은 성인담론의 쾌도난마를 시의적절하게 보여주었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임꺽정’을 발표한 고우영은 만화를 성인에게 걸맞는 문학적 지평으로 끌어올렸다. 주로 ‘삼국지’ ‘수호지’ ‘일지매’ 등 고전을 재해석했던 작가는 탁월한 해학과 비평을 보여줬다. 필자 제공

한국만화의 끌차

실제 고우영은 태어난 곳이 중국이다. 당시 만주국,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번시에서 30년대 말 유복한 집안의 셋째 아들로 자랐다. 광복 이후에는 평안남도로 이주했다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가며 만화가의 삶을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만주국에서 경찰 간부로 근무했던 아버지는 해방 이후 친일 전력과 상관없이 경찰로 문제없이 살던 동료들과 다르게 일제에 부역한 과거를 반성하며 세상을 등진 낙향거사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와 만화가였던 두 형의 노력으로 생계가 유지됐다. 그리고 아버지와 두 형이 요절한 이후, 본인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만화가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고우영은 둘째 형 고일영의 유작인 ‘짱구박사’를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며 만화방에 데뷔하였으나, 초기 크게 돋보인 작가는 아녔다. 이미 중학생 때부터 디즈니의 미키마우스를 기초로 한 ‘쥐돌이’를 그려냈던 영재만화가는 만화방 시스템에서 생계형 작가였다. 이후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재능있는 그림만으로 월간지 ‘어깨동무’에서 초대 미술부장을 역임하며 잡지와 만화라는 새로운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 일간스포츠의 연재 시작은 그에게 있어서 인기작가라는 세상의 평가와 함께 한국만화를 제도권 내의 스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사회적 견인차 구실까지 담당하게 한다.

고우영은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다양한 취미에서 달인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와 여행, 등산, 낚시, 골프 등에 이르는 장르적 도전으로 연계된다. 아내와 함께 다니기 시작한 성당에서 영세명 요셉으로 세례를 받고, 평화신문에 돈키호테를 신부로 해석한 만화 ‘몬시뉼키호테’를 연재했으며, 교리 책 ‘교리책 밖의 교리 이야기’ 등을 출간하고는 성경 전체를 만화로 만들어보려는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 고전의 시작과 끝을 모두 정리해보겠다는 야망 같은 욕심도 부렸고, 등산, 낚시, 골프 등 스포츠마다 마치 안내서 같은 교범을 만화로 만들어보겠다는 시도도 했다.

주기적으로 여행을 기록해 70년대 미국여행기록 ‘미국만유기’, 80년대 유럽여행 이후 ‘유럽만유기’, 90년대 중국여행이후 ‘중국만유기’ 등 전 세계 여행에 대한 백과사전 같은 만화를 기획 출간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실용학습만화와 삽화 등에도 도전했다. 조선왕조 500년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겠다는 의욕의 전집기획 등 어떤 주제와 목표에 집중하면 무엇이든 최고로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는 한국만화사에 또 다른 도전들을 추동시켰다. ‘고우영의 맛있는 골프’에서는 전국 131개 골프장의 길과 맛집까지 소개했는데, 그와 함께 라운딩했던 지인들에 따르면 어떤 단골 골프장의 몇 번 홀 나무 밑에 숨겨둔 위스키병이 있었고, 그 홀에 갈 때마다 그 병을 찾아 마셨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해학과 비평의 이정표

윤승운 신문수 이정문 허어 이두호 박수동 등과 함께 낚시동호인 모임 ‘심수회’를 만들어 본인이 알고 지내던 사회의 인적네트워크와 만화계를 연결했다. 1980년대 말에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등의 예능프로그램 출연하고, 라면과 맥주 광고에 이어 ‘가루지기’ 영화시리즈의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1988년부터 4년 동안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역임하며, 변화하던 한국만화의 지평을 넓히고 만화방 만화와 잡지만화를 넘어서 단행본 시대로 직진하던 한국만화의 작가들을 하나로 모이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고우영의 스포츠신문 연재는 이후 방학기와 강철수, 이현세와 허영만, 이재학과 하승남 등의 스타작가 군단을 일간지 연재로 동참하도록 했고, 한국만화가 해내야 할 새로운 서사와 주제, 장르들을 거침없이 도전하게 했다. 2001년 고우영 만화 다시 읽기 붐을 일으킨 MBC라디오의 고우영 삼국지 라디오드라마는 잠자던 팬덤을 부상시켰고, 인터넷신문 딴지일보에 재연재된 ‘고우영 삼국지’는 무삭제 CD판으로 복간되어 신세대 독자들을 매혹시켰다. 한국일보 이사대우 편집위원을 역임하며 신문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완성했던 작가 고우영은, 2005년 향년 66세로 독자들 곁을 떠난다.

프리미엄 만화의 시대를 열어젖힌 천재작가, 대사와 연출의 미학을 영화와 문학 수준으로 끌어올려 만화의 새로운 해석과 도전을 보여준 악동 같은 천재, 그래서 모두가 보고 싶어하는 작가, 고우영은 늘 신선한 시도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미 1980년 1월 8일 기고했던 동아일보 칼럼에서는 대학에 만화과가 생길 거라며 본인은 너무 바빠서 주임교수 요청을 거절할 것이라는 특유의 자화자찬을 만화적 상상으로 표현했는데, 시대를 앞서가는 그의 발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풀샷으로 보이는 원경 샷이 대사보다 더 큰 나레이션의 힘을 보여주는 스킬, 그 어떤 후배작가도 범접할 수 없는 이런 여유로운 작화는 여전히 한국만화에서 기념비적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에서는 탈선의 만용이 유머로 용인되는 여백이 있다. 시대적 고증과 언어의 계급성을 뛰어넘는 콜라보와 융합의 대향연, 그래서 축제 같은 고전 역사만화의 고우영식 코스프레는 여전히 지금도 한국만화가 배워야 할 유머의 매뉴얼이며, 해학과 비평의 이정표다.

한창완 세종대 융합예술대학원장·만화애니메이션텍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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