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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동 성도 어찌 버리나” 분당으로 교회 이전 고민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19>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가 1995년 경기도 성남 분당구 정자동 예배당에서 부활절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1988년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새에덴교회를 개척한 지 4년째 됐을 때다. 그간에 예배당도 76㎡(23평)에서 396㎡(120평)로 옮겼고 뜨거운 총동원 전도 행사도 두 번이나 치렀다. 성도 수도 300여명으로 부흥했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건축위원회가 구성되고 인근의 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근에 마땅한 땅이 없었다. 특히 가락동 지역은 상업지역이었기에 땅값이 너무 비쌌다. 겨우 100평, 150평밖에 살 수 없었다.

그즈음 인근에서 우리 교회와 비슷한 시기에 개척한 작은 교회 목회자가 경기도 성남 분당신도시에 가서 새롭게 시작했는데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가락동에서 가까운 분당신도시로 이전하자고 제안했다. 분당 시범단지 입주가 끝나고 양지마을 입주를 앞둔 때였다.

건축위원들과 함께 분당 지역을 답사해보고 몇몇 교회도 탐방해봤다. 교회 부흥에 대한 확신이 오고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이라도 이곳에 오면 단숨에 1000명, 2000명을 이룰 것 같았다.

교회가 많지 않은 데다가 이제 막 구름 떼같이 사방에서 사람들이 입주하는 신도시는 그야말로 황금어장이었다. 이곳에 와서 내 특기를 살려 새에덴교회의 바람을 불게 하면 성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리라는 그림이 보였다.

교회에 돌아와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설득했다. 모두가 이 일에 전적인 희생과 헌신을 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분당 양지마을의 G상가 5층을 계약하기로 했다.

문제는 집을 가진 성도들이었다. 전세로 사는 분들은 분당으로 가는 데 찬성했는데, 가락동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반대했다. “왜 꼭 분당으로 가야 합니까. 100평이든 150평이든 이곳에 땅을 사서 지으면 되지, 왜 가려고 합니까.”

이 일을 놓고 하나님께 심각하게 기도했다. 기도원에 들어가 3일을 금식하며 하나님 뜻을 여쭸다. 목회 평생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만약에 교회 이전에 반대하는 성도들을 버리고 분당으로 훌쩍 떠나버린다면 얼마나 상처가 되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나를 뭐라고 평하겠는가.

기도원에 가서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면서 분당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 사람이라도 이 일로 상처를 받을까 염려가 됐다. 개척 초창기 강단에서 기도하던 중, 주께서 주신 말씀도 생각났다. 많은 사람을 먼저 원하지 말고 내가 보내준 한 사람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교회 성장이 좀 더디더라도 먼저 하나님이 맡겨주신 성도들을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단했다.

오직 가락동에서 보내주신 성도들을 죽도록 사랑하며 목양 일념으로 목회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분당으로 이사를 간 성도 가정에 심방을 갈 일이 있어 그 전에 계약하기로 했던 G상가를 가봤다. 이미 그곳에 다른 교회가 들어왔는데 개척 1년 만에 800명이 모이고 있었다. 짧은 기간에 부흥한 모습을 보니 충격이었다. 가슴을 치며 울고 싶었다.

내 마음을 안 교인들이 들고 나섰다. 특히 분당행을 반대했던 분들이 찾아와 분당으로 가자고 졸랐다. “목사님, 이제는 우리 교회가 분당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집을 팔고 분당으로 이사를 해도 되고 승용차가 있으니까 집을 팔지 않아도 분당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목사님은 분당에 가서 더 큰 목회를 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헌신하겠다”고 나섰다. 그다음 주부터 분당 땅을 사거나 상가를 분양받자며 건축헌금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성도들이 신년 축복성회에서 찬양을 하는 모습.

그즈음에 종교부지가 하나 나왔다. 원주민 교회에서 소유한 것인데 도저히 건축할 능력이 되지 못해 타 교회에 매각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땅을 계약했다. 분당에 제일 늦게 늦깎이로 가서 이삭줍기 목회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분당으로 이전하면서 단 한 사람도 실족하게 하지 않았다. 부득이 오지 못하는 성도도 눈물로 축복해 줬다. 물론 교인 대다수는 분당으로 왔다.

나는 원래 성격상 뭐든 밀어붙이는 사람이다. 그때 기질대로 밀어붙였다면 분명히 성도들에게 아픈 상처를 주고 교회에도 회오리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고집과 생각을 누르고 인내하면서 사랑과 섬김의 꽃씨를 뿌리니 그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도하고 헌신하며 분당행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정말 중요한 목회원리를 깨달았다. 급할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목회는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일, 하나님이 맡기신 한 영혼, 한 영혼을 생명처럼 여기며 돌보는 것이다. 그렇게 분열과 다툼을 하지 않고 한마음, 한뜻으로 결정한 분당행은 새에덴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서막이었다.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 흑암의 노예로

생명나무를 선택하면 생명이 풍성할 뿐만 아니라 영혼이 순결하며 투명한 영성을 소유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얼마나 영혼이 순결하며 투명한 영성을 소유했는가. 그 영혼의 생명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속했고 하나님만 의지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이 그런 순결했던 하와를 유혹해 죄로 부정하고 오염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고후 11:3)

그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굉장히 영민하고 총명한 사람이었다. 얼마나 영민하고 총명했느냐면 아담이 그 많은 동물과 산천초목의 이름을 다 지었다.(창 2:19~20)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담과 하와의 영혼이 순결했으며 투명한 영성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눈만 감아도 하나님이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눈을 뜨나 감으나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교통했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지 않고 생명나무를 선택했더라면 그는 순결 중의 순결, 지혜 중의 지혜, 총명 중의 총명을 계속 누렸을 것이다. 영적 투명함, 곧 영원히 투명한 영성을 소유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어 버렸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채 어리석음의 종이 됐고 영혼이 부패하고 오염돼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스스로 두렵고 떨려 동산나무 아래 숨어 버렸다. 스스로 심령이 캄캄하고 흑암의 노예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원래 가졌던 그 지혜와 총명함을 다 빼앗겨 버리고 사망과 저주와 온갖 어리석음의 노예가 돼 버리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의 유혹을 받는 순간부터 영혼의 순결함과 영성의 투명함이 조금씩 흐려졌다고 할 수 있다. 사탄의 유혹을 받으면서 선악과를 다시 보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기 때문이다.(창 3:6)

여기서 지혜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는 정반대다. 이건 전적으로 사탄이 주는 선악의 지혜를 말한다. 유혹을 받는 순간 하와는 이미 정신이 흐려지고 판단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그것을 따 먹고 하와는 온갖 저주와 어리석음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사람은 먼저 영혼이 순결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투명한 영성이 생긴다. 이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고 복잡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독대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생명을 먼저 선택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영혼이 순수해지고 내면의 영성이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이 지혜와 판단의 눈으로 보면 어떤 길이 망하고 어떤 길이 형통한 길인지 다 보인다. 이때의 판단력과 지혜로 결단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고 형통하게 된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지혜가 생명나무이고 생명나무가 곧 지혜라고 말씀한다. 우리 삶 속에서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나는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의 우선순위가 선악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먼저 찾고 하나님과 깊은 독대의 관계를 갖는 생명나무를 선택하라고 강조한다. 먼저 영혼이 순결하고 그 순결성 안에서 깊은 지혜와 영감을 얻도록 한다. 하나님의 계획을 보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이 어찌 원망과 불평, 불통과 패배의 노예로 살아가겠는가.

교회는 순결한 영혼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 영혼이 오염되고 마음이 더러워지면 말은 옳은 것 같지만, 그 말에는 남을 죽이는 독성이 있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해악적 파동이 있다. 새에덴교회는 오늘도 성도들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기 위해, 아니 순결한 교회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생명나무 목회를 한다.

소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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