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신사참배 거부, 기독학교 살리는 지혜를 얻다

쿤스·최태영 교장과 서울 연지동 경신학교

서울 종로구 연지동 옛 경신·정신학교 터. 중앙 나무에 가려진 건물이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왼쪽이 ‘총회100주년기념관(예장통합)’이다. 연지동 일대는 연동교회와 두 학교 땅이었다. 기독교 전래 이래 선교타운이었던 이곳은 매각과 신축 등으로 대부분의 기독교문화유산이 사라졌다.

지난주 몇 차례 서울 연지동 옛 경신학교 터를 방문했다. 경신학교 터는 현재 현대그룹 빌딩이다. 터 남쪽으로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 ‘연동교회’ ‘한국기독교회관’ 등이 있고 서쪽으로 ‘여전도회관’이 위용을 자랑한다. 동쪽으로 1㎞ 지점엔 옛 동대문교회와 동대문부인병원 터가 있다. 북쪽으로 2㎞쯤 가면 현 경신중·고등학교가 있다.

연지동에는 또 ‘한국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한국군선교연합회’ 등 크고 작은 기독교 선교단체·신문사·교단 등이 즐비하다. 연지동 선교타운은 1960~80년대까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한 한국현대사의 정신적 성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한국교회사와 기독교교육의 전환점이 됐던 의미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1937년 정초.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분개했다. 그러나 무력 앞에 힘이 없었다. 당시 장로회 선교사 쿤스(한국명 군예빈), 로즈, 겐소, 코엔, 언더우드 2세(원한경)는 ‘5인 회의’를 열어 대책을 숙의했다. 이미 가톨릭, 감리회가 신사참배 참여로 결론 낸 상태였다.

그들은 연지동 겐소(1884~1951·회계사) 선교사 사택에서 기도로 지혜를 구했다. 당시 선교사 사회는 신사참배 문제를 두고 목회 선교사와 교육·의료 선교사, 서울과 평양 교계 간 미묘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일제는 민족 교육에 앞장서는 미션 스쿨이 눈엣가시였다. 따라서 교계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성경 교육이 필수인 미션스쿨을 ‘각종 학교’로 취급, 그 학교 학생이 상급 학교 진학을 못하도록 압박했다.

이에 따라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부 선교사 등은 ‘종교 교육도 없고 우상에 절하는 선교학교’가 된다면 폐교가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육·의료선교사들은 병원·학교 자체가 복음 전파를 위한 기관이므로 ‘참여 없는 참석’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전권을 쥔 5인 회의는 폐쇄 결정을 내렸다.

황해도 장련 광진학교 생도 최태영(앞줄 원)과 교사 김구 선생(뒷줄 원).

‘5인 회의’ 현장에 두 사람의 한국인이 있었다. 경신학교 부교장 최태영과 김명선(1897∼1982·평양기독병원장 역임) 박사였다. 5인 위원은 동양 사상 개념의 ‘신사참배(神寺參拜)’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 위원들은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최태영에게 자문했다.

“신사에는 두 귀신이 있습니다. 실존 인물도 아니었던 아마테라스 오미가이고 또 하나는 한국을 이 지경으로 만든 메이지 일왕입니다. 둘 다 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설명을 들은 5인 회의는 이렇게 선포했다.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에 어긋난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반대한다.”

이 5인 회의 결정에 따라 그해 6월 21일 평양 숭실학교에서 모인 장로회 선교사 150여명이 신사참배 거부안을 통과시켰다. 최태영이 옵서버로 참석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열린 조선인 장로회 총회에서는 일제가 총회장 김선두 목사를 평양행 기차에서 연행하고, 순사들을 동원해 총회원을 윽박질러 신사참배 참여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참배 여부가 신학적 논쟁이 되면서 내분을 불렀다.

1939년에는 평양신학교의 총독부 등록 여부를 놓고 장로회 선교부 공의회 투표 결과 32대 3으로 학교 폐쇄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쿤스 선교사와 캐나다 선교사 2명이 총독부 안대로 일단 등록해 학교가 선교적 도구로 활용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현 현대그룹 사옥 터의 경신학교 본관. 신사참배 문제로 정릉으로 이전한다.

이러한 학교 폐쇄 결정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학교가 경신학교였다. 1886년 언더우드에 의해 초등과정으로 설립됐던 학교는 1901년 중·고등 과정으로 재개교했다. 교육 선교사 쿤스는 ‘전도자 학교’가 아닌 ‘기독교 지도자 양성학교’로 가고자 했다. 김규식 안창호 김병희 이갑성 민충식 김원벽 김상덕 임영선 나영주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가 배출됐다. 쿤스는 일본의 진주만 습격 후 조선총독부에 체포돼 6개월간 수감되고 그 과정서 간첩 혐의 등으로 물고문 등을 받았다.

한편 황해도 기독 명문가 출신 최태영은 스승이자 교장인 쿤스의 기독교 교육 방향에 따랐다. 최태영은 경신학교에서 교사 장지영 주시경 함태영 등으로부터 민족교육을 받았고, 연말이면 성극에 출연해 에스더 역을 맡은 곱상한 수재였다. 메이지대학에서 영법학을 전공한 그는 고향 장련에 있을 때 3·1만세운동이 발발하자 궐기 연설을 했다. 그는 헌병대에 끌려가 옥살이를 했다. 미성년자라서 3개월 옥살이에 그쳤다. 동창 김원벽이 이때 잡혀가 매 맞고 죽었다. 그 후 최태영은 메이지대학 졸업 후 쿤스의 요청으로 경신학교 부교장이 됐다.

한편 쿤스는 선교사들의 학교 폐쇄와 철수를 ‘파괴’라고 보았다. “당신들은 철수하면 그만이다. 조선의 성도와 백성들이 우리를 원망하는지 왜 모르는가. 그들은 버려진 양들이다”라며 한탄했다. 쿤스는 경신학교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부교장 최태영에게 ‘총독부 교육법 테두리 안에서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다. 최태영은 황해도 거부 안악의 김씨 문중 김홍량(1885~1950·교육사회운동가)이 학교를 인수해 기독교 교육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김홍량가는 그의 처가쪽 가문이기도 했다. ‘안악사건’으로 8년간 옥살이를 했던 김홍량은 일제 말기 소극적 친일을 했다.

쿤스에 이어 경신학교 교장이 된 최태영은 어떤 방법으로든 우상에 절하지 않았다. 학교는 해방 후 다시 한국교회에 되돌려졌다.

경신수공부(手工部) 교사 자리. 1970년대 전후 이화예식장이란 웨딩명소였다.

사실 연지동 경신학교는 연희전문학교(대학부)를 설립하는 등 기독교교육과 한국 교육사의 뿌리다. 쿤스와 최태영은 암울한 시대, 신앙의 양심을 지키려 했던 공리주의적 그리스도인이다. 두 사람은 친일로 보기 어렵다. 되레 박해를 받았다. 율법 아래 저항했던 그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정신학교 언더우드기념관. 1978년 민간에 매각됐으나 소유자가 보존하고 있다.

후기. ‘5인 회의 현장’을 확인 못했다. 그러나 정신여고 언더우드관과 강당, 운동장 등이 온전히 남아 있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경신학교와 한 공간에서 나란히 운영됐던 정신여학교는 1978년 서울 잠실동으로 이사했다. 정신학교 건물을 넘겨받은 비그리스도인 소유자가 “근대 문화유산인 이 학교를 절대 부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에스윈 쿤스 (1880~1947)
미국 뉴욕 매클린 출생. 목사 아버지를 따라 아이오와주에서 성장했다. 장로계 코우대학에 다니면서 빈민구제 단체 선샤인 미션 활동을 했다. 오번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1903년 제물포에 도착했다. 평양과 황해도 재령에서 순회 목회를 했으며 이후 경신학교 교장이 됐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으로 대일 심리전에 참여했다. 해방되자 유창한 한국말로 “나는 1942년 왜적이 조선을 떠나라고 하야 피눈물을 먹음고 돌아왔다. …조선 만세 조선 만만세”라고 방송했다.

최태영 (1900~2005)
황해도 은율군 장련 태생. 장련 광진학교에서 교사 백범 김구로부터 신식 교육을 받았다. 경신학교 일본 메이지대학 영법학과 졸업.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수를 믿었으며 모펫·게일 선교사 등과 가족처럼 지냈다. 경신학교 교사 및 교장, 보성전문 부산대 서울대 중앙대 청주대 숙명여대 등에서 가르쳤다. 1954년 이래 학술원 회원. 단군이 우상이 아닌 역사 인물이라는 연구를 계속했다.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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