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으면 얘는 어쩌죠?” 26년 간병 엄마, 고통은 끝이 없다 [이슈&탐사]

[‘미친’ 사람들과의 인터뷰-정신질환자 장기수용 실태 추적기] <2부> 오류의 반복 ⑤ 탈진하는 가족

정신질환 딸을 26년간 간병한 김경숙씨가 26일 집 근처 공원에 앉아 쉬고 있다. 그녀는 정신병원 개방병동에서 지내고 있는 딸이 사회로 나오면 지낼 곳이 없다고 걱정했다. 인천=윤성호 기자
대기업에 다니던 딸은 좀체 잠을 자지 못했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이면 집 밖으로 나가 문이 열린 아무 교회나 들어갔다. 매일 어딜 그렇게 다니나 하고 말았는데, 한참 지난 뒤에야 이유를 알게 됐다.

“살려주세요. 죽지 않게 해주세요.” 딸은 매일 그렇게 빌면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제야 딸이 누군가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환청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일단 큰 병원부터 가야겠다는 생각에 서울의 상급 종합병원 정신과로 데려갔다.

26년이라는 긴 싸움의 시작은 처음부터 꼬였다. “남는 병상이 없네요.” 입원치료가 필요한데 그곳엔 자리가 없었다. 의사는 자매 병원이라며 2차 병원을 소개해줬다. 그렇게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쯤 딸은 거식증과 실어증까지 왔다. “의사가 뭐라고 질문하는데 말이 안 나오니까 볼펜을 찾더니 적어요. 살고 싶다고. 악마가 찾아와서 죽이려 한다고.”

독박 간병의 시작

돌이켜보면 딸이 달라진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안 하던 반항을 하고, 대들던 딸의 변화를 김경숙(70)씨는 그저 ‘사춘기겠거니’ 하고 넘겼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대기업에 취직했는데, 딸은 이상한 말을 하며 아침마다 회사를 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이 병을 사춘기로 아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내가 바로 그랬어요. 부모도 모르고, 본인도 모르고 그렇게 병을 키웠어요.”

딸의 손을 잡고 처음 폐쇄병동에 입원시킨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1층 계단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는 왜 그리 깊고 어두워야 했는지, ‘철컥’ 소리를 내며 닫히는 육중한 철문을 보며 생각했다. 그 뒤로 울면서 6개월을 보냈는데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너무 오래 방치했던 것이다.

그 무렵 슬슬 간병의 한계가 느껴졌다. 남편 없이 홀몸으로 입원비를 대왔는데, 입원 7개월째부터는 보험 적용이 안 돼 병원비가 올랐다. 100만원대 월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과거 이혼하고 소송까지 낸 뒤에야 양육비를 보내줬던 남편이 딸 치료비를 내줄 리도 만무했다.

돈이 없어서 일단 딸을 퇴원시켜 데리고 나왔는데, 악이 났다. ‘나으려면 낫던가.’ 치료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용하다는 병원을 뒤지며 전국을 돌았다. 외래 진료와 입·퇴원을 반복하는 새 5년이 지났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던 김씨의 월급 170만원과 고등학교 졸업 후 곧장 직업군인으로 입대한 동생의 월급이 모두 딸 병원비로 들어갔다.

다행히 딸의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 상태가 호전된 딸을 정신재활시설로 보냈다. 이곳에서 만난 다른 환자는 딸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줬고, 그는 딸에게 청혼했다. 이제 고비를 넘은 줄 알았는데 결혼 3년 만에 딸은 온몸이 멍투성이가 돼 돌아왔다. 남편의 폭력으로 충격을 받은 딸은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김씨는 딸의 몸에 남은 상처들을 증거로 진단서를 끊어 법정싸움까지 벌였다.

“딸이 그래요, ‘엄마가 재판 이혼 안 해줬으면 나는 맞아 죽었을 거야’라고. 근데 그래도 우리 애는 결혼도 해보고 드레스도 입어봤으니까, 딸 가진 다른 환우 엄마들이 ‘여기 딸은 할 거 다해봐서 좋겠다’며 그걸 부러워하더라고.”


간병에 치이다

다시 입·퇴원이 반복됐다. 폭력성이 발현되는 조현병 양성 증상이 강해졌다. 딸은 집에 있다가 증상이 심해지면 “왜 나를 죽으려고 하냐”며 엄마를 괴롭혔다. 급성기 때 딸이 밀쳐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고 죽을 뻔했던 경험도 있다. 산책시키려고 데리고 나갔다가 딸이 들고 있던 우산에 눈을 찔려 인공 수정체 수술까지 받았다. 딸은 유독 엄마와 단 둘이 있을 때 증상이 심했고, 늙어가는 엄마는 점점 딸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집에서 경찰을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 딸을 보낼 수 있는 곳은 오직 ‘폐쇄병동’뿐이다. 어렵게 알아낸 ‘그룹홈’에도 보내봤지만 그곳 규칙은 2주에 한 번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한번 집에 돌아온 딸은 다시 나가고 싶지 않아 했다. 1년에 몇 달씩의 정신병동 격리가 관성처럼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2주에 한 번 면회 가고 2~3달에 한 번씩 퇴원시키고 했어요. 만날 집에서 손가락 꼽는 거예요, 애가 입원한 지 몇 달 됐나 하고.” 그녀는 손가락을 꼽으며 죄책감으로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가족의 삶에는 빈곤이 덕지덕지 붙어 앉았다. 자가였던 집은 구시가지 옥탑방으로까지 흘러내려갔다. 2인 가구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받고서야 임대아파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정신질환자 치료와 돌봄에 모든 걸 쏟아내다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는 건 흔한 일이다. 김씨는 자신의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주변에 애가 증상이 심각한데도 입원 못시키는 집이 있어요. 병원에 입원시키면 수급비가 몇십만원 줄어드니까.”

딸이 병원에 입원하면 입원비용 격의 의료급여가 빠지고 통장에 40여만원이 들어온다. 함께 살 때보다 20여만원 줄어드는데, 이 돈 때문에 자녀가 방문을 잠그고 틀어박혀 있는데도 입원시키지 못하는 보호자를 봤다고 김씨는 말했다. 긴 독박 간병 생활로 빈곤이 깊어진 가정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렇게 버텨가며 간병한 세월이 26년이다. 딸이 폐쇄병동 철문 뒤로 처음 들어갔을 때 40대였던 엄마는 흰머리 난 할머니가 됐고, 딸은 그때 엄마 나이가 됐다.

“앞으로는 어떡하죠. 10년 후는요. 그때면 나는 세상을 떠났겠죠. 동생도 (돌보기) 싫다고 하니 저 혼자 사는 길밖에 없는데….”

가족에게 정신질환자 간병의 짐을 모두 떠맡기는 구조의 결과는 정신병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일보가 확인한 정신병동 10년 이상 입원환자 1만4890명(국민일보 26일자 1·4·5면 참조) 중 40세 이상 65세 미만이 1만1951명(80.3%)이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조현병은 10, 20대 때 발병하는데 그 사람들이 40대가 되면 부모들은 돌볼 능력이 안 되는 노인이 된다”며 “가족 중심의 정신질환관리시스템 작동이 안 되는 때가 이때부터이고, 이후 장기입원으로 관리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그 상황이 뻔히 보이는 모양이다.


도움 안 되는 국가

김씨 사례는 정신질환자 가족이 겪는 어려움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오랜 기간 치료와 돌봄에 돈과 정성을 쏟아부으면서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탈진해갔다. 급성기 치료를 끝낸 뒤 정신병동을 나선 환자는 약물복용과 사회활동을 통한 정서적 안정 등 관리가 지속돼야 하는데 그 짐은 오롯이 가족이 졌다.

국민일보가 5월 초 한국정신장애인가족협회, 한국정신장애인 가족지원활동가와 공동으로 환우 가족 3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도 이 같은 현실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환우 가족들은 모두 경제적 소모를 호소했다. 설문조사 참여자인 박은정(가명·52)씨는 아들이 발병한 뒤 6년 동안 병원비와 상담료, 약값 등으로 총 1억3000만원을 썼다고 했다. 독박 간병이 길어지면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된다. 한 보호자는 “(정신질환자가) 취업을 하기 어려우니 경제적으로 생활이 힘들고, 보호자도 둘 중 1명은 (돌봄 때문에) 같이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된다”고 했다. 정신질환자 동거 가족의 하루 평균 돌봄 시간은 6시간 이상이라는 답이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정신건강복지센터 등 공적 돌봄 조력자를 이용하고 있다는 응답은 20%가 채 안 됐다.

국가로부터 받은 지원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다수 응답자가 ‘아예 없다’거나 의료급여, 전기세감면, 무료 상담 같은 지원을 꼽았다. 모두 실질적인 지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신질환자 시설 ‘탈원화’ 정책의 핵심 기반인 커뮤니티 케어를 체감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박씨는 동네 센터의 재활 프로그램을 보며 기가 막혔다. 27살의 아들에게 진행된 프로그램은 ‘음식 나눠 먹기’ ‘종이접기’ 정도였다. 다른 재활시설은 산꼭대기에 있었고, 맘에 드는 곳은 100㎞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이가 치료를 잘 받고 약 복용도 잘해 증상이 좋아질 땐 뭔가를 하고 싶어 해요. 근데 막막해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그런 다음 단계가 없어요.” 박씨의 한숨이 짙었다.

급성기 치료를 끝낸 김씨의 딸 역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김씨는 낮에 각종 프로그램을 하고 취업까지 연계해준다는 민간 재활시설에 문의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답변은 “6개월 더 기다려라” “1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답이었다. ‘차라리 비싸서 못가는 게 낫겠다. 어떻게 이렇게 갈 곳이 없을까’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동네 정신건강복지센터 재활 프로그램은 하루 2시간짜리가 전부였다.

그나마 있는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례가 많았다. 영희연(60)씨는 몇 번의 실패를 겪고서야 조현병에 걸린 아들(38)을 돌봐줄 활동보조사를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영씨는 “처음 배정된 보조사는 ‘해줄 게 없다’고 하고, 두 번째 보조사는 ‘일이 생겼다’며 떠났다. 1~2주를 버티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그 일이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아파트에 살았는데 경비실에서 ‘우리 아파트에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있다.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방송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이사를 왔어요. 모르면 그럴 수 있다고 이해는 하려고 합니다.” 환우 가족들은 자신의 힘듦을 토로하지 못하고 죄인인 듯 숨죽여 살았다.


가족도 살고 싶다

그들은 장기입원의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한 응답자는 “환자의 인권이 중요한 만큼 보호자에게도 인권이 있다.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보이는 건 정신병동 장기입원밖에 없다”고 했다. 다른 응답자도 “국가와 지역사회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에서 (장기입원은)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했다.

가족들은 환자의 자립을 위한 환경 조성 필요성을 호소했다. 김씨의 딸은 어떻게든 사회에서 살아보려고 폐쇄병동에서 일본어 자격증도 땄는데, 일자리는 구할 수 없었다. 한 보호자는 “회복에는 일만큼 도움 되는 게 없다는 걸 번번이 경험하지만, 단기 3개월이거나 6개월짜리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보니 회복할 만하면 계약이 끝나고, 집에서 생활하다가 증상이 악화되는 일이 되풀이된다”고 말했다. 다른 보호자도 “폐쇄병동처럼 가두어만 두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성이 작동할 수 있는 생활시설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응답했다.

정신질환에 대한 교육도 부탁했다. 한국의 경우 조현병 발병 후 치료받기까지 기간이 약 56주로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추천하는 12주보다 훨씬 길다. 병에 대한 정보 부족과 사회적 편견 때문에 조기발견과 초기치료가 어려워지는 구조다. 한 응답자는 “정신질환에 대한 교육을 평상시에 교육기관, 공공기관, 기업체 등을 통해서 해야 한다”며 “사회에서 함께 살기 위해 이들에 대한 선입견 개선 작업도 같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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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빈 김판 임주언 박세원 기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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