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의 랜드마크가 된 IFC서울 중정에 설치된 김병호 조각가의 작품 ‘조용한 증식’. 봄날 꽃가루가 퍼져가는 모습을 시각화했다. 레몬색 조각품의 수평적인 형태는 수직으로 치솟은 마천루 사이에서 당당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최현규 기자

꽃의 형태인데, 자꾸 보니 도시 여성의 은유 같았다. ‘에이, 그럴 리가’ 싶다면 정면 방향에서 조각물을 한번 보라. 좌우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부채처럼 퍼지는 형태에서 바람에 확 퍼지는 스커트 자락을 움켜쥐는 여성이 연상되지 않나. 흑백 사진 속 그 메릴린 먼로말이다. 이 조각물을 뒤쪽에서 보곤 손뼉을 쳤다. 엉덩이를 뒤로 쑥 내민 것 같은 조각의 ‘뒤태’가 사뭇 육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각물의 레몬색이 주는 상큼함에선 ‘로마의 휴일’에 나온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기에 뭘 연상하든지 그건 이렇듯 자유다. 먼로나 햅번은 왕년의 배우. 김태리나 한소희 정도를 떠올려야겠지만 내 상상력은 거기까지였다.

이 조각물은 한국의 월가 여의도에 설치돼 있다. 배우 현빈을 연상시키는 차가운 도시 남자들, 빈틈없는 이미지의 펀드 매니저들이 활보하는 곳이다. 2012년 8월에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며 들어선 IFC서울 안에 있다.

IFC서울은 콘래드서울 호텔과 3개 동의 초고층 오피스타워(32층, 29층, 55층)로 이뤄진 복합상업건물이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국제적인 설계회사 아키텍토니카가 설계·디자인한 이 건축물은 귀퉁이를 과감하게 잘라냄으로써 만들어진 기하학적 단면, 유리 표면에 반사되는 빛과 그림자 덕분에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크리스털 조각품’이라고 자찬한다.

조각가 김병호. 최현규 기자

외국 작가의 조각물이라고?

IFC서울 건축물들이 ‘ㄷ자’형태로 감싼 중정의 초록 잔디에 놓여 있는 이 조각물을 자주 봤지만, 외국 작가의 작품이겠거니, 생각했다. 홍익대 미대를 나온 40대 김병호(46) 작가의 작품이라는 얘기를 듣곤 놀랐다. 2012년 8월에 IFC서울이 완공되기 한 해 전에 수주를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37세였다. 미술관 밖으로 나온 공공 조각 1호라고 했다(서울 종로구 케이트윈타워에 설치된 비슷한 조각은 같은 해 늦게 주문 받았으나 설치는 더 빨리 됐다). 30대 신예에게 눈길을 주는 그런 파격은 건물주가 외국계여서 가능했던 일이었는지 모른다. 작가는 자신이 30번째 제안서를 내밀었고 본사의 심사를 통과했다고 했다. 최소 30대 1의 경쟁률이었다는 얘기다.

조각 작품 제목은 ‘조용한 증식’. 파스타 면 다발을 움켜쥐곤 중간쯤에서 구부린 뒤 한쪽 끝을 부채처럼 펼친 형국이다. 꽃의 수술과 꽃잎을 합성한 느낌이기도 하고, 꽃피는 장면을 초고속촬영해 처음과 마지막을 합체한 느낌이기도 하다. 면의 가닥 같은 파이프의 끝은 트럼펫의 나팔 모양으로 퍼졌는데, 거기서 소리가 나온다. 멀리서 보면 뭉툭한 끝은 꽃 내부 수술대 끝에 달린 볼록한 꽃밥 같기도 하다.

나는 왜 이 조각이 외국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지? 문득 궁금해 곰곰 생각해봤다. 건축주가 외국계이니 외국 작가를 선정했을 거라는 연상 작용이 자연스럽게 일어났을 것이다. 핑계를 대자면 합리적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레몬색이 주는 싱그러움에서 서구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녹색을 띤 레몬색은 개나리의 노랑이 주는 토속적인 느낌과 차이가 있다. 조각의 레몬색과 잔디의 초록색이 이루는 색면의 대비는 야수주의 화가 마티스 작품처럼 경쾌하게 다가온다.

두 번째는 서울에 설치된 여러 공공 조형물이 갖는 전형성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도심의 빌딩 앞에 설치된 조각물을 관찰해봐라. 대부분이 인물 형상의 구상 조각이거나 추상 조각이라 하더라도 금속성의 반짝임, 혹은 철의 육중함을 특징으로 한 것이 많다. 이건 디자인적인 요소가 섞여 있기도 해 식상하지 않다. 새로움이 주는 신선함이 있었다.

세 번째로 조각 작품에 할애한 넓디넓은 면적은 놀라운 수준이어서다. 시내 곳곳의 공공 조각물은 계단 옆에 옹색하게 서 있거나 화단 안에 쪼그리고 앉듯 설치돼 있다. 이곳은 농구장 크기의 넓은 잔디밭이 몇 개 구획지어 펼쳐져 있는 중정에 야외 조각물이라곤 이것 한 점 뿐이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수입 잔디인 덕분에 사계절 초록과 노랑의 대비를 감상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조각물은 제단 위에 근엄하게 군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지에 친근하게 뿌리를 박고 있다. 점심시간이면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온 도시의 선남선녀들이 조각물 옆에 드러누워 마천루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구경했다. 안타깝게도 뉴욕에서나 볼 수 있던 그런 자유분방한 모습을 지금은 볼 수 없다. 그 사이 건축물 소유주가 미국계 AIG글로벌부동산에서 캐나다계 글로벌 대체투자운용사인 브룩필드자산운용으로 바뀌었고 잔디밭은 한국의 여느 곳처럼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이 됐다. 잔디밭을 금지구역으로 설정하지 않았다면 한국 공공 조각의 롤모델이 됐을 것이다.

비조각과 출신의 새로운 상상력

김병호의 공공 조각이 주는 신선함은 조각 전공자가 아닌 데서 오는 자유로운 사고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그는 판화과 출신인데, 판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조각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보이지 않은 걸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비가시적인 것이야말로 세상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봄날 꽃가루가 퍼져가는 것은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벌과 나비의 수분 활동으로 며칠 사이 꽃이 활짝 피어나는 생명의 경이가 일어나잖아요. 그런 비가시적인 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무언가 퍼져가는 상황을 은유하는 선(線), 이왕이면 선의 다발이 필요했다. 조각 전공자들이 몸에 익힌 깎고, 붙이고, 용접하는 등의 전형적인 조각 공정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에게 산업 재료가 눈에 들어왔다. 기성품의 쇠파이프, 너트와 볼트 등 모듈화 된 부품이 재료가 됐다. 컴퓨터 설계 프로그램을 이용해 정교하게 설계한 뒤 그런 부품화된 산업 재료를 가공해 조립함으로써 조각이 완성됐다.

대량생산된 산업 부품들이 그의 조각 작품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인공적인, 도시적인 느낌이 나는 ‘쎄끈한’ 김병호의 조각 세계를 두고 미술평론가 이상윤은 ‘디지털 피조물’이라고 했다. 기하학적인 정확성과 대칭에서 오는 균형감, 그러면서 반복과 변주가 주는 리듬감이 있다.

김병호 작가의 작품인 ‘정원’(위 사진)과 현대자동차남부서비스센터. 작가 제공

노마드 인생이 주는 불안도 기꺼이

그의 작품에서 점차 불안감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조용한 증식’ 연작에선 파이프의 끝이 나팔처럼 벌어져 있다. 하지만 이후 나온 ‘정원’ 시리즈에선 천장에서 내려온 무수한 파이프의 끝이 잘 깎은 연필의 끝처럼 뾰족해졌다. 게다가 수직으로 내려오지 않고, 사선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어 불안감을 준다. 작가는 파이프의 끝을 뾰족하게 한 이유에 대해 “세상과 닿는 면을 가급적 첨예하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왜일까. 현대인의 삶은 점점 정박하지 못한다.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시대는 지났다. 미래는 일을 좇아 이 직장 저 직장에서 일하는 게 가능해지는 직업인의 시대가 열린다. 정주가 아닌 노마드 인생이 펼쳐진다. 파이프의 뾰족한 끝은 그런 노마드 인생에 대한 미술적 언어가 아닐까.

정원 시리즈에서 파이프에 표현된 알록달록 원색은 도장업체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색으로 구성됐다. 현대인의 보통 삶을 상징하는 색이다. 그러므로, 파이프에 들어간 원색은 노마드인생의 불안함도 기꺼이, 쿨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요즘 젊은이들을 표상하는 것 같다.

작가의 정원 시리즈는 건물의 파사드 형태로 형식적 변주를 하고 있다. 여의도에서 올림픽대로로 접어들어 잠실 방향으로 가다보면 노량진 수산시장 인근 쯤에서 외관이 그 알록달록 직선으로 둘러싸인 현대자동차 남부서비스센터를 볼 수 있다. 이 공공조각 1호 이후 김병호 작가의 작품은 서울의 르메르디앙 호텔, 대림산업, 조니워커 하우스, 천안 신세계백화점, 부산 신세계백화점, 세종 정부세종청사 등 전국으로, 홍콩과 중국 프랑스 체코 등 세계로 퍼져가고 있다. 그야말로 ‘조용한 증식’이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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