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용 목사의 ‘팔복 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복음 5장 7절


팔복에서 말하는 ‘긍휼’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픔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스플랑크니조마이)’(눅 7:13)라고 하셨다.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은 ‘창자가 꼬이다’라는 말이다. 즉 창자가 꼬일 듯이 아프고 괴로운 마음. 그것이 긍휼이다.

긍휼의 또 다른 헬라어 단어는 ‘엘레에오’이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두 맹인과 가나안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신 이야기에 등장한다.(마 9, 15장) 이 두 경우 모두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엘레에오)’고 요청했다. 이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자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첫째, 이들은 자가치료가 불가능한 자들이다. 맹인도 귀신들린 자도,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으로는 나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둘째, 자격 없는 자이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자기의 필요를 요구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들이다.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좇은 적도, 재산을 팔아 헌금한 적도, 예수님의 사역을 도운 적도 없다. 더구나 가나안 여인은 당시에 유대인이 상종하지 않던 이방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긍휼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능력도 자격도 아닌, 그들이 가진 ‘믿음’ 때문이었다.(마 9:29, 15:28)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 자꾸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 내게 주어진 은혜에 대한 원인을 항상 나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그것이 훨씬 합리적이기에 우리는 자꾸 하나님께 뭘 해서 인정을 받으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받을 수 있는 원인은,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얘기한다.

누가복음 10장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온다.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한 사람을 살린다. 그때 성경은 이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겼다(스플랑크니조마이)고 말한다.

보라. 강도 만난 자는 사마리아인에게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심지어 살려달라는 요청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치료했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아니 하나님에 관해 관심조차 없었던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죽음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긍휼은 누군가를 향하여 갖는 안타까운 마음, 애타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의 복은 ‘남을 불쌍하게 여겨서 도와주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긍휼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석돼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선택을 받아서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쏟아 부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이 팔복이 말하는 긍휼이다.

예수님이 말하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나의 의와 희생으로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한량없는 십자가의 긍휼을 타인에게 흘려보내는 사람이다.

내 의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일을 행하는 자는 계속된 그리스도의 긍휼을 삶 속에서 공급받게 된다. 그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요”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이다. 내 의지와 수고로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고 복 받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복음으로 살 수 있다.

이수용 목사(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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