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창덕 작가는 ‘꺼벙이’ 등 세대를 아우르는 만화를 꾸준히 발표하며 ‘명랑만화의 대부’로 자리매김했다. 친근한 캐릭터와 일상성을 앞세운 그의 만화는 늘 교훈적이고 따뜻했다. 필자 제공

5시에 울리던 애국가와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던 국기 하강식. 여름방학이면 시골 친척 집에 다녀온 기억. 학교에 모여 나무를 심던 식목일. 어린이날에는 무료였던 창경원과 어린이 대공원.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회와 청군-백군 기마전, 김밥 도시락. 집 앞 버스 종점 옆에 있던 짜장면 가게. 친구들과 함께하던 탐정 및 탐험 놀이. 또랑또랑 외우던 국기에 대한 맹세. 1970~80년대 이와 비슷한 유년 시절을 보낸 모두의 추억 한편에는 길창덕의 명랑만화가 자리잡고 있다.

명랑만화의 대부

당시 어린이 신문과 잡지에는 길창덕 만화가 빠지지 않았다. 소년한국일보 독자들은 신문을 펴면 먼저 ‘재동이’를 찾았다. 잡지 ‘새소년’의 부록으로 배달됐던 ‘선달이 여행기’를 먼저 찾아보았고, ‘꺼벙이’를 보기 위해 ‘소년중앙’을 들었다. 해태유업에서 제공한 부록만화 ‘마음의 등불’ 때문에 해태 우유를 먹자고 조르기도 했다. 우리가 지나온 1970~80년대에는 머리의 땜통 자국, 커다란 혹, 반쯤 감긴 졸린 눈. 선 몇 개로 쓱쓱 그은 캐릭터가 잔상처럼 남아있다.

길창덕 만화에 가장 열광한 세대는 1970~80년대 유년 시절을 보낸 이들이지만, 길창덕 만화의 독자는 몇 세대가 함께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아리랑’이나 ‘실화’ ‘야담’ 같은 대중잡지에 연재하던 만화를 본 당시 어른들이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연재한 어린이 만화를 본 세대가 있으며, 1970년대부터 연재를 시작한 ‘꺼벙이’ 세대와 80년대 ‘쭉쟁이’ ‘재동이’ ‘고집세’ ‘코메디 홍길동’ 등의 만화를 본 세대도 있다. 마지막으로 1996년 단행본으로 새롭게 출판된 ‘내동생 꺼실이랑 우리오빠 꺼벙이’를 본 세대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길창덕의 명랑만화는 20세기 한국사와 함께하고 있다.

‘코미디 홍길동’(왼쪽)과 ‘쭉쟁이 행진곡’. 필자 제공

길창덕은 1929년 12월 11일 평안북도 선천군 동림면에서 아버지 길경춘과 어머니 서정희 사이에 6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천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세가 강했고, 상공업이 발달했다. 길경춘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개신교회 장로였다. 길창덕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해 아이들을 건사했다. 크리스천으로 성실하게 살았던 아버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길창덕은 자신이 만화를 통해 충(忠)·효(孝)와 같은 교훈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길창덕의 명랑만화는 ‘일탈’보다는 ‘교훈’을 중시했다.

불세출의 캐릭터들

1943년 정주 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길창덕은 정주역에 근무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1월 27일 길창덕은 어머니를 두고 고향 정주를 떠났다. 부산으로 내려간 길창덕은 빨리 고향에 돌아갈 요량으로 1951년 8월 군에 자진 입대해 4년간 교육 담당으로 근무했다. 1955년 제대 후에는 형의 장사를 도와주며 만화를 그리고 시를 썼다. 만화가 문하에 들어가지 않고 독학으로 만화를 익혔다. 잘못 그리면 고치는 걸 배우지 못해 매번 처음부터 다시 그리며 특유의 선을 완성했다. 어느 날 길창덕은 그동안 작업한 만화와 시를 모아 ‘서울신문’에 보냈다. 이후 1955년 7월 18일자에 ‘머지않은 장래의 남녀상’이 채택됐고, 8월 1일 ‘사랑의 남신상’, 8월 9일 ‘공처가’, 8월 22일 ‘입체영화 이문(立體映畵異問)’등 만화가 잇달아 게재됐다. 반면 시는 모두 탈락했다. 내심 시인이 되고 싶었던 길창덕은 시인의 길을 접고 만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길창덕은 1956년 월간 ‘실화’에 네 칸 만화 ‘허서방’을 발표한다. 간간이 발표된 길창덕 만화는 독자와 편집자를 사로잡았다. 이듬해 ‘야담’ ‘소설계’ ‘삼천리’ ‘만화천지’ 등에 단편 만화를 발표했다. 1958년 당시 최고 인기잡지이던 ‘아리랑’에서 청탁이 왔다. 길창덕은 당시 큰 인기를 끌던 양훈-양석천 콤비의 캐릭터 ‘홀쭉이와 뚱뚱이’를 만화로 옮긴 같은 제목의 7쪽짜리 원고를 연재했다. 일반적으로 대중잡지에 발표된 당시 만화는 한 칸에서 네 칸짜리거나 아니면 한두 쪽짜리였다. 길창덕은 파격적으로 7쪽짜리 만화를 연재하며 일약 ‘장편’ 연재 만화가가 됐다. 1960년대 들어와 여러 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면서부터는 만화방용 만화를 출판하는 출판사에서 어린이용 만화 단행본 출간 제안이 들어왔다. ‘의사 까불이’로 인기를 누리던 김경언의 권유로 ‘이도령전’(1962) ‘멀건이’ ‘온달 일등병’ ‘소식 깡통이’(1963) ‘희극 심청전’ ‘말썽장이 그림자’ ‘머저리 조합장’(1964) ‘괴상한 지남철’(1966) ‘마법의 달팽이’ ‘딸기코 할아버지’(1967) 등을 펴냈지만, 단행본 제작 속도를 맞출 수 없었다. 그렇다고 팀을 만들어 만화를 그리기도 싫었던 길창덕은 만화방용 만화 대신 잡지 만화에 주력했다.

1965년 소년한국일보에 매주 수요일마다 ‘말썽이’를 연재한 뒤, 1966년 같은 신문에 최장기 연재작 중 하나인 ‘재동이’를 연재했다. ‘재동이’는 모범적인 주인공 재동이와 말썽꾸러기인 복돌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네 칸 만화로 무려 4800회가 연재됐다. 1968년 어린이 잡지 ‘새소년’에는 ‘뜸북이’를, ‘소년세계’에는 ‘깜박이’를 연재하며 활동영역을 넓혔다. 1969년 청소년 잡지 ‘학원’에는 기타를 끼고 사는 고등학생 돌석이가 주인공인 ‘돌석이’를 연재했다. ‘돌석이’는 명랑만화가 어린이 만화를 넘어 청소년 만화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돌석이’의 실험은 1980년대 들어 김수정의 ‘오달자의 봄’으로 이어졌다.

‘순악질 여사’. 필자 제공

1970년 ‘여성중앙’ 1월호에는 길창덕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한 편인 ‘순악질 여사’가 길고 긴 마라톤의 첫발을 내디뎠다. 틀어 올린 머리, 단정한 에이프런에 어울리지 않는 일자 눈썹과 남편을 쥐고 흔드는 순악질 여사는 한국 만화사에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순악질 여사’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고, 김미화와 김한국이 출연한 개그 프로그램으로 활용되며 모르는 사람이 없는 캐릭터가 됐다. 한국 만화 역사상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캐릭터인 ‘꺼벙이’도 1970년 어린이 잡지 ‘만화왕국’에 연재를 시작했다. 이후 1974년 ‘소년중앙’으로 자리를 옮겨 연재를 계속하면서 ‘꺼벙이’는 우리나라 만화의 대표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꺼벙이’. 필자 제공

시대의 거울

길창덕 만화를 형식적으로 구분하면 ‘이야기가 연속되는 스토리 만화’와 ‘매회 에피소드가 완결되는 옴니버스’로 나뉜다. 1970~80년대 어린이 잡지에 부록으로 제공한 만화를 제외하면 친근한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옴니버스형 만화가 중심을 이룬다. 내용도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해프닝과 교훈을 담은 동서양의 다양한 예화의 방식이다. ‘마음의 등불’을 제외하면 길창덕 만화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해프닝을 담은 명랑만화다. 하지만 이런 명랑만화에도 액자식으로 예화가 삽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행만화인 ‘선달이 여행기’나 보물섬을 찾아가는 ‘신판 보물섬’은 형식적으로 스토리 만화이면서 내용적으로 일상의 해프닝을 담은 만화였지만, 중간중간 교훈을 담은 예화를 들려줬다. ‘꺼벙이’ 같은 옴니버스 만화도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은 어른 화자를 내세워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교훈적인 예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신판 보물섬’. 필자 제공

길창덕 만화는 명랑만화다. 명랑만화는 웃음을 주더라도 친근함과 일상이 강조되는 장르다. 길창덕은 일탈이나 파괴 같은 개그 코드는 사용하지 않았다. 전교에서 제일 먼저 등교했는데 알고 보니 방학이어서 집으로 돌아간다거나, 이웃돕기를 하면서 매번 실수만 거듭하는 주인공의 미숙함을 웃음 코드로 활용했다. 실수로 일을 끝마치지 못해도 주인공 옆에는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 1970~80년대 어린이 독자는 길창덕 만화에서 친근한 캐릭터가 주는 웃음과 함께 가족과 친구의 따뜻함을 느꼈다. 길창덕 만화는 당시를 살았던 우리의 모습과도 알맞게 포개진다. 우리는 꺼벙이·쭉쟁이·돌네·꺼실이·고집세·재동이면서, 복돌이·멀건이·만복이·딸딸이·고철이·덜렁이·박달도사·선달이·필승이·다부지·돌석이기도 했고, 때로는 순악질 여사와 순악질 남편이었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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