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 속 여름은 그늘 한 점 없는 따가운 햇볕과 더불어 먹구름에 끝 모르게 퍼붓던 장대비가 대조돼 떠오른다. 햇빛이 쨍쨍할 때는 친구들과 한참 땀에 젖어 놀다가도 시원한 수박 한 입이나 얼음 동동 미숫가루를 훌떡 넘기면 금세 다시 신이 났다. 그런데 왠지 장마 때면 노는 것도 시들해져 창문에 떨어지는 빗방울만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그러다보면 요란한 매미 소리와 경쟁하듯 퍼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아득한 옛일만 같아서, 장맛비는 왜 다른 비 오는 날들보다도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건지 갸웃거리게 됐다.

크면서 보니, 장마뿐 아니라 자연의 변화는 각각의 색과 감정을 전해주었다. 가을비는 알록달록 낙엽에 빛을 더해 어딘가 풍성한 안도감을 준다. 기온이 낮아진 거리에 깔리는 초겨울 비는 아무리 안개같이 약한 빗줄기여도 풍경과 마음을 더 허하고 오싹하게 흔들고, 언 땅을 녹이는 봄비는 새로 피어나는 새싹들의 노래 같아 반갑다. 그리고 얼마 전 내린 비는 대기가 끓어오르기 전,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마저 생명력 넘치는 초여름의 기억을 불러왔다.

비상근으로 출근하는 센터는 매일 오가는 병원이나 학교 건물과 달리 계절이 그대로 느껴지는 오래된 건물의 매력이 있다. 그래서 회의를 마치면 혼자 건물 각 층을 천천히 둘러보는 게 나름 루틴이 됐는데, 그날도 내부를 돌아보던 중에 예고 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방문객이 없는 불 꺼진 층에 다다르자 초여름을 부르는 빗소리는 한층 더 가깝게 들렸다. 짙푸른 나뭇잎 사이로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들이 음악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다 나도 모르게 아무도 없는 책상에 앉았다. 비의 방문은 예상보다 짧게 끝나 어느새 부쩍 녹음이 짙어진 풀밭에 이슬만 남고 공기도 한층 가벼워졌다. 잠깐의 비가 여름을 한 뼘 더 불러온 듯하니, 어느새 여름의 생명력을 온전히 느낄 나날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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