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4000 피난민 태운 빅토리호 무사히 거제 도착 ‘크리스마스의 기적’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14>

1950년 12월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1만4000명의 피난민이 탑승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간신히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한 유엔군은 모두 흥남으로 집결했다. 유엔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유를 찾아 나선 피난민들이 순식간에 흥남부두로 몰려들었다. 10만명 이상의 피난민이 몰린 흥남부두는 통제 불능 상태였다.

12월 12일부터 미군과 국군병력 10만5000명, 차량 1만7500대, 군수품 35만t을 철수하는 작전이 시작됐다. 동원된 수송선은 모두 193척, 병력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기 위해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이 밤낮없이 이뤄졌다.

철수 과정에서 배가 부족해 알몬드 장군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한국군은 중공군과 싸우며 걸어서 갈 테니 피난민을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이었던 통역관 현봉학 박사도 알몬드 장군에게 애원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현봉학의 고향은 함흥이었다. 함흥에는 많은 기독교인이 있었다. 공산당이 점령하면 이들의 목숨이 제일 위험했다. “장군님, 이들은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는 자들입니다. 지난 5년간 그들은 공산주의자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유엔군을 도와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알몬드 장군은 결국 피난민 구출을 명령했다. 사실 미 10군단은 유엔군뿐만 아니라 북한 피난민을 철수시키기 위한 계획을 이미 세웠다. 미국 정부에서 비밀해제된 유엔군 측 자료를 보면 맥아더 사령관은 12월 8일 흥남 철수 작전계획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복당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들을 흥남에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9일에도 맥아더는 10군단 사령관에게 민간인들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보복당할 염려가 있는 정치인들을 가능한 한 많이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흥남철수작전에서 미군은 애초부터 북한 피난민들에 대한 구출계획이 없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군인 철수가 끝나고 19일부터 북한 피난민의 철수가 시작됐다. 22일이 됐을 때 피난민 구조를 위한 배는 7600t급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1척만 남았다. 빅토리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의 고민이 깊어졌다. 정원은 60명인데 승무원 48명이 타고 있었다. 화물을 다 내려놓아도 2500명 이상은 탈 수 없었다. 부두에는 아직도 수많은 인파가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흥남부두는 배를 타려는 인파로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그들 가운데는 손에 십자가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배를 태워줄 것을 호소하는 10대 소년소녀도 있었다. 라루 선장은 결심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22일 금요일 밤 9시 30분부터 피난민 승선을 시작했다. 23일 오전 11시 10분이 돼서야 승선이 종료됐다. 선원들은 공간이란 공간은 물론 조그마한 틈새까지도 피난민들을 밀어 넣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 레너드 라루.

라루 선장은 피난민을 한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배에 실었던 200t의 탄약, 500여개의 포탄, 유류 500드럼 등 장비와 물자를 다 버렸다. 그리고 피난민을 1만4000명까지 태웠다. 폭 19m, 길이 138m의 7600t급 상선은 초과승선이었고 선내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피난민들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3일 오후 2시 54분 남쪽으로 출항했다.

빅토리호는 48명의 선원이 머무는 선실 외에 12인용 선실밖에 없는 화물운반용 선박이었다. 위생설비도 없기에 수천명을 태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배에 있던 현채린씨의 증언이다.

“우리는 배를 못 타면 몰살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화물선은 미국 상선이었는데 3개 층으로 돼 있었어요. 배에서 애를 낳는 것도 봤어요. 대소변도 그 자리에서 봐야 하니 냄새가 말도 못 했습니다.”

동해안의 차디찬 겨울 바다를 지나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앞길에는 만만찮은 위험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기뢰를 탐지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장비도 없이 바다를 헤쳐나가야 했다. 당시 흥남항 부근 항로에는 4000여개의 기뢰가 살포돼 있었다. 두 달 전에는 3척의 미해군 소해정이 기뢰에 의해 침몰했다. 1주일 전에는 미해군 상륙정 4척이 기뢰에 폭파됐다.

인근에서 작전 중인 소련군 잠수함에 발각돼 적군 어뢰에 격침당할 수도 있었다. 빅토리호는 비무장 상선이고 호위함도 없었다. 더군다나 철저한 보안을 위해 어떠한 무전 교신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빅토리호는 아래쪽 선창에 300t의 항공유까지 싣고 있었다.

거제도에 도착한 북한 피난민이 선원에게 써준 감사 편지.

이러한 악재 속에서 25일 낮 12시 42분 빅토리호는 거제도 장승포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3일간의 험난한 항해 중에도 죽거나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탄생했다.

훗날 라루 선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종종 그 항해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처럼 많은 사람을 태우고,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끝도 없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해 크리스마스, 바다의 거친 파도 속에서 배의 키를 잡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피난민이 모두 배에서 내린 그 날 밤, 라루 선장은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항해 중 5명 탄생. 사망자 없음. 1만4005명 무사히 상륙시킴.”

김재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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