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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아홉 살 소녀의 가냘픈 외침

한승주 논설위원


목숨걸고 탈출한 창녕 소녀, 사회가 먼저 발견할수 있었다
지자체와 학교 정보공유 절실
아동학대 가해자 81%가 부모… 집으로 보내지 말고 분리해야
아이는 소유물 아닌 인격체… 이들이 보내는 신호 잘 살펴야

악몽이 시작된 건 2년 전, 엄마가 새아빠와 결혼하면서부터다. 아빠는 쇠파이프로 나를 때렸다. 목에 자물쇠가 채워진 쇠사슬을 감아 4층 빌라 꼭대기 베란다에 묶어 놓았다. 지문을 없앤다며 달궈진 프라이팬으로 손가락을 지졌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욕조 물에 머리를 박아 숨을 제대로 못 쉬게 했다. 뜨거운 쇠젓가락으로 발등을 지졌다. 밥은 하루에 한 끼만 먹였다.

지난 5월 29일, 아빠가 집을 비웠고 마침 목에 묶여 있던 쇠사슬이 풀렸다. 이때다. 지금이 아니면 이 집을 탈출할 수 없다. 무서웠지만 용기를 냈다. 베란다 난간을 넘어 지붕을 기어서 건너면 옆집이다. 지붕이 기울어져 있어 가다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무조건 나가야 한다. 높이 10m의 지붕을 타고 옆집으로 들어갔다. 비어 있는 옆집을 나와 한참을 빌라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밖으로 나가 무조건 달렸다. 맨발에 잠옷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길을 걷다가 어떤 어른을 만났다. 배고프다고 하니 먹을 걸 사줘서 허겁지겁 먹었다. 그리고 경찰서에 데려갔다.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집에는 가기 싫어요.

경남 창녕에서 계부와 친모에게 학대당하다 극적으로 탈출한 아홉 살 소녀 이야기다. 사랑만 받고 자라도 모자랄 아이가 자칫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 방치됐다. 정황을 보면 아이가 탈출하기 전, 사회가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는 2015년부터 2년 동안 경남의 한 위탁가정에서 자랐다. 이후 엄마와 같이 살게 됐고, 2017년 2월 거제로 이사를 갔다. 거제시는 전입신고 과정에서 ‘아이가 학대 및 돌봄 곤란 사유로 위탁가정에서 분리 보호를 받았다’는 정보를 보건복지부를 통해 전달받았다. 하지만 이를 학교에 알리지 않았다.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이를 알았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방자치단체와 교육기관이 아동학대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협조하는 체제가 없다. 두 기관의 공조는 아동복지학계의 오랜 요구 사항이다. 지금이라도 자세히 살펴볼 일이다.

아동학대 사건은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8년 2만4604건, 하루에 약 67건의 비명이 들려온 셈이다. 이 중 부모 친인척에 의한 학대가 81.4%다. 피해 아동을 다시 학대한 사례의 95.4%도 가해자가 부모다. 아이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을 때 비극은 커졌다. 그래서 학대 행위자인 부모와 피해 아동을 떼어놓는 분리 조치가 중요하다. 아이가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국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

최근 일련의 아동학대 사건을 계기로 법무부가 부모의 자녀 체벌을 금지하는 민법 개정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법 개정도 중요하지만 더 급한 것은 우리의 인식 변화다. 전통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자식은 부모의 소유라는 개념이 강했다. 내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회초리를 들겠으니 상관하지 말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웃집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더라도 내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방치했던 면이 있다. 이젠 바뀌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다. 외국에서 아동학대는 큰 범죄다. 미국에서는 아이만 두고 부모가 집을 비워도 이웃에서 신고할 정도다.

창녕 소녀 사건에 문재인 대통령도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토록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아이가 위기인 줄 몰랐다”며 “아이를 만나 보듬어주는 조치를 취하라”고 말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만 온 사회가 분노했다가 어느샌가 잠잠해지는 일이 수도 없이 있었다. 이번엔 정말 일회성 분노나 보여주기 식 대책에 그쳐서는 안 된다. 더 이상 학대받는 어린이가 나오지 않도록 이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빈틈없이 갖춰야 할 것이다. 아동학대 관련 예산을 대폭 늘리고, 인력을 보강하고 전문성을 높이는 등 지속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꽃으로라도 때리지 말라고 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도 있다. 아동학대 징후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교사, 의료진, 아동시설 종사자 등은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로 지정돼 있다. 이제는 이들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나서야 한다. 어디선가 외치고 있을 아이들의 비명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들릴 가냘픈 외침일 것이다. 이들은 지금도 어딘가에 갇혀 외롭게 신호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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