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 마저 매각 추진… 사립미술관, 진흥의 시대 끝났다

‘간송 쇼크’ 이어 미술계 충격

이영미술관 외관. 이영미술관 홈페이지
2005년 전혁림 개인전 때 전시장을 찾았던 노무현 대통령 부부. 이영미술관 제공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이영미술관은 20년 역사의 지역 미술관이다. 전혁림 박생광 등 대표적인 현대미술 작가에 대한 소장품을 기반으로 2001년 컬렉터 출신 김이환씨가 문을 열었다. 2005년 전혁림(1916∼2010) 화백의 구순 기념 개인전 때는 노무현 대통령이 전시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 이영미술관이 재정난 끝에 축소 이전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져 미술계가 술렁이고 있다. 문화재청으로부터 45억짜리 수장고 건립비까지 지원받는 국내 1호 사립인 간송미술관이 재정문제로 보물 불상 2점을 경매에 내놓았다가 유찰된 ‘간송 쇼크’가 터진 직후라 문화계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사립 박물관·미술관에 대한 정부 지원 제도를 현실에 맞게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간송미술관 보화각. 간송미술관 홈페이지
간송미술관이 경매에 내놓았던 불상들. 각각 보물 284호 금동여래입상과 보물 제285호 금동보살입상(왼쪽부터). 간송미술관 제공

돈은 안 되고 세대교체도 안돼 휘청

이영미술관의 김 관장은 2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한 달 관리비만 2000만원이 넘게 나온다. 수익은 없는 상황에서 견딜 길이 없다. 매각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용인시에 기증을 제안하며 시립미술관으로의 전환을 추진했지만 불발된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제2, 제3의 이영미술관의 사례가 예견되는 등 상당수 사립미술관의 현실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모란미술관 야외조각공원. 모란미술관 제공

경기도 남양주 모란미술관도 2세 체제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으면서 운영 유지가 어려운 상태다. 조각 전문 공간으로 1990년 개관한 이래 권위있는 조각상을 마련하는 등 미술계 발전에 공헌했지만 현실을 이기지 못했다. 올해 20주년인 경기도 광주 영은미술관은 레지던시(작업실 무료 제공) 전문 공간으로 출발했다.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지금은 작가들에게 입주비를 받고 있다. 서울의 T미술관, H미술관 등도 전시 기획은 잘하지만 속으로는 멍들어가고 있다.

사립미술관들은 1세대가 의욕적으로 20, 30년간 운영해왔지만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 특성상 재정적으로 한계에 봉착해 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대교체가 원만히 이뤄지지 않으면서 개점휴업인 곳도 적지 않다. 그래서 정부 지원이라는 ‘링거’에 의존해 연명하는 곳이 많다. 미술계 인사 A씨는 “공모 사업 기획서를 잘 써서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이 학예사의 능력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기획한 전시도 결국 돈 들어가는 사업이다. 죽지 못해서 한다는 곳이 많다”고 전했다.

미술관 진흥은 낡은 패러다임

정부는 사립 박물관·미술관에 각종 지원을 한다. 학예 인력과 교육 인력 총 2명까지 1인당 월 160만원을 지원한다(자부담 40만원). 이 용도로 지난해 박물관(226명)과 미술관(61명) 인력 총 287명에 54억6900만원이 지원됐다. 인턴 채용, 소장품 데이터베이스화, 인문학 프로그램(건당 수천만원) 등 박물관·미술관의 ‘진흥’에 지난해 투입된 나랏돈은 110억원이다. 1년 전에 비해 28억원이 증가했다. 지방자치단체도 각종 지원을 한다. 경기도의 A미술관의 경우 시에서 진입 도로를 놔줬고, 매년 수억씩 프로그램 운영비를 지원한다.


정부 지원은 1992년 제정된 박물관·미술관진흥법에 근거한다. 김영호 중앙대 교수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박물관·미술관 1000개 시대를 열겠다며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지원을 하는 내용을 담아 이 법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소장품 80점만 있어도 박물관·미술관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전기세 감면, 교육세 면세, 도로세 면세 등 세제 지원도 학교 법인 수준으로 이뤄지게 됐다. 덕분에 사립 박물관은 1993년 28곳에서 2019년 363곳으로, 사립 미술관은 같은 기간 14곳에서 172곳으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부작용도 적지 않다. 미술관으로 문을 열어 세제 혜택은 받으면서 레스토랑으로 변칙 운영하는 곳도 있다. 부산 지역의 H미술관 등 일부 지방 미술관은 상속세를 탈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소문도 돈다. 홈페이지도 없으면서 90일간의 법정 운영 기간만 채우는 식으로 정부 지원금을 타먹는 ‘나쁜 미술관’도 있다.

박물관·미술관 진흥은 낡은 패러다임이 됐다. 김 교수는 “하루 빨리 문 닫아야 할 곳이 많다. 링거를 빼는 순간 죽는 미술관이라면 사망 절차를 밟을 수 있게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퇴로를 열어주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김영순 전 부산시립미술관장은 “과거에는 공공미술관이 부족해 사립미술관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는 점에서 지원할 만했다. 지금은 자자체에서 박물관·미술관을 계속 만들어 공적 역할에 대한 소임을 다한 만큼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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