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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칼럼] 슬기로운 여름휴가


바이러스 공포와 경제 한파에 팍팍하기만 했던 올 상반기
코로나 장기전을 버텨내려면 재충전의 휴식이 필요하다

이번 여름휴가는 방역 최전선 의료진·보건요원이 우리에게 만들어준 휴식의 기회
못 쉬고 싸우는 이들을 위해 언택트·힐링·배려 키워드로 휴가지 확산 차단해야

확진, 격리, 마스크, 집단감염, 수출 부진, 고용 대란…. 우리는 올해 상반기를 온통 팍팍한 단어에 둘러싸여 보냈다. 코로나19는 일상의 많은 즐거움을 한꺼번에 앗아갔다. 언제 회복된다는 기약도 없다. 함께하면 그래도 좀 낫기에 K방역을 방패 삼아 다 같이 고통을 견디고 있지만, 견디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전쟁터의 병사에게도 휴식은 필요하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이미 장기전에 접어들었다. 잘 견디려면 지금쯤 쉼표를 한 번 찍어야 한다. 매일 오전 10시 신규 확진자 수에 희비가 교차하는 일상과 잠시 거리두기를 하는 것은 더 긴 싸움을 위해 충분한 가치가 있다. 2월부터 내리 다섯 달을 코로나와 열심히 싸운 당신, 떠나야 할 때가 됐다.

주위에 여름휴가 계획을 물어보곤 한다. 돌아오는 대답에서 세 가지 특징을 추릴 수 있었다. ①해외여행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6월 소비자 조사에서 해외여행 의향을 가진 응답자는 8%에 불과했다. 이들도 의향이 있을 뿐 출입국 제한과 격리 규정을 감안하면 실행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해마다 여름휴가 출국 행렬은 전체 휴가객의 30%를 넘겨 대세가 됐는데, 그 인파를 고스란히 국내에서 소화해야 하는 낯선 여름을 맞이했다. ②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한 사람이 많다. 휴가의 성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재충전의 여름휴가에 안전과 치유의 개념이 추가됐다. 코로나로부터 안전하게,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휴식. 언택트·힐링 여행의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 보니 지자체마다 드라이브스루 여행 코스나 캠핑·차박 명소 같은 제안을 내놓고 있다. ③계획을 세운 경우에는 제주도에 가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모처럼 비행기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기분을 낼 만한 곳. 국내에서 제주를 먼저 떠올리는 건 아주 자연스럽다.

이런 분위기는 제주 숙소 예약률로 나타나고 있다. 신라호텔이 6월 첫 주에 접수한 7~8월 예약 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두 배를 기록했다. 많은 대형 호텔이 지난 주말 예약률 80~90%를 찍어 사실상 만실로 운영됐다. 2~3월 20%에 머물던 렌터카 가동률도 이달 70%까지 높아졌다. 지난주 찾았던 제주에서 북적임이 되살아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었다. 숙소의 아침 식당은 구석진 자리까지 빈 곳이 없었고, 구좌읍 풍림다방에선 대기 명단에 이름을 적고 한참 기다려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관광객 2명의 확진 소식을 들었다. 한 명은 증상이 있는데 해열제를 10알이나 먹으며 나흘간 여행했다. 많은 접촉자가 격리됐다. 놀란 제주도는 그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겠다고 밝혔다. 이 강경한 조치는 응징이라기보다 호소에 가깝다. 휴가 인파가 몰려들 7~8월 제주에서 집단감염, n차 감염이 터지는 상상은 끔찍하다. 많은 사람이 기다리던 휴식의 기회가 사라질 수 있고, 그 상실감의 후유증은 감염 공포보다 클지 모른다. 소송은 광역단체 중 확진자가 가장 적은 이 섬이 중요한 여름을 잘 보내도록, 지친 이들이 오랜만에 얻는 휴식을 망치지 않도록 제발 방역수칙 지켜 달라는 읍소 같은 거였다.

제주가 신기한 섬인 까닭은 여행 트렌드가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원래 올레를 걸으러 가는 곳이었다. 그 길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니 카페와 맛집이 생겨 그것을 순례하는 여행이 자리를 잡았다. 올레를 다 걸은 사람들은 오름을 하나씩 오르기 시작했고, 오름 여행의 시간이 지나자 아예 한 달씩 살아보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번에 간 제주는 또 다른 여행이 등장해 있었다. 3년 전부터 늘어난 작은 독립서점이 55곳이 됐다. 무명작가의 ‘신춘문예 낙선집’처럼 대형 서점에선 찾기 힘든 책이 꽂혀 있고, 예약을 하고 가야 책을 보여주는 서점도 있다. 사람들은 무림의 고수가 도장(道場) 깨기를 하듯이 서점을 다니며 책방 지도에 스탬프를 찍는다. 55개를 다 찍었을 때의 보상은? 기분이 좋다.

이렇게 여행의 발굴이 이뤄지는 섬에서 올여름 언택트와 힐링과 배려의 새로운 여행이 탄생하면 좋겠다. 랜드마크 관광지에 가야 한다는 중압감은 버리자. 사람이 몰릴 곳을 피하는 건 미덕이 됐고, 방역수칙을 지키는 건 배려가 됐다. 이 휴식의 기회는 방역 최전선의 보건요원과 의료진이 만들어준 것이다. 많은 소상공인은 휴가를 미룬 채 경제 한파에 맞서야 한다. 우리가 쉬는 동안에도 그들은 싸우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여름을 슬기롭게 보내야 그들이 휴가를 갈 수 있다.

편집국 부국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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