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새 성전 기공 예배날 장대비… “하나님께서 왜 이러실까”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24>

2003년 7월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 부지에서 열린 프라미스 콤플렉스 기공 예배 장면. 이날 예배시간에 맞춰 비가 그치고 쌍무지개가 떴다.

경기도 용인 죽전에 새롭게 세워질 예배당 설계를 마치고 2003년 7월 27일 오후 3시 기공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예배드릴 준비를 마쳤는데 문제는 날씨였다. 장마철에 새 성전 기공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장마가 아니라도 7월 말 폭서 아래 기공 예배를 드리는 것도 무모한 일이었다. 수십 명이 모일 행사도 아니고 2000명 이상 모이는 큰 행사였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행사는 망치게 되고 강렬한 뙤약볕이 내리쬐면 건강한 사람도 현기증이 날 게 뻔했기에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밀어붙였다. 단 하루라도 공사를 빨리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어찌 날씨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도했다. 그날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있어도 구름이 가득 끼게 해달라고.

하나님께서 날씨만큼은 책임져주시리라고 믿었다. 하나님께 한 가지를 더 구했는데, 날씨를 통한 주님의 징조였다. “주님, 날씨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새에덴교회의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가실 것이며 역사해주실 것인가에 대한 징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시옵소서.”

그리고 내심 이렇게 기대했다. 오전엔 햇빛이 강하다가도 오후 3시가 되면 짙은 구름 기둥이 덮이도록 역사해주실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기대와 달리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침 9시쯤 되면 비가 그치고 햇빛이 나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12시가 돼도 계속 비가 내렸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행사를 1시간 앞둔 오후 2시가 됐는데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목사님, 기공 예배 현장에선 땅이 너무 질퍽거려 예배드리기가 힘듭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서 예배를 준비하십시오.” 날씨의 낌새로 보아선 하늘이 맑아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하나님의 상징적 징조가 어떤 것인지 애가 타기만 했다.

기공 예배를 드리든, 못 드리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징조였다. 그래서 솔직히 초조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실까. 분명히 약속하신 성전인데…. 하나님은 어떤 의도를 갖고 계신 것일까.’

2시 30분이 가까워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쳐 버렸다. 예배는 예정대로 시작됐다. 드디어 설교 시간이 다가왔다. 단상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 놀랐다. 구름 사이로 약속의 무지개가 아름답게 펼쳐졌다. 감사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 감격, 이 은혜, 이 사랑! 이런 기적을 주시려고 장대 같은 비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역전의 은혜를 기다리게 하셨구나 싶었다. “오 주님, 당신은 역시 살아 계신 우리 새에덴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분명 당신의 위대한 능력으로 이루실 줄 믿습니다.”

설교 시간에 흥분을 참지 못하고 원고에도 없는 내용을 성도들에게 외쳤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하늘을 보세요. 쌍무지개가 떠 있잖아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내리던 장대비가 그쳤어요. 저 하늘에 지금 쌍무지개가 떠 있잖아요. 이게 어디 우연의 일치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언약의 증표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누가 시킨 것처럼 성도들이 일제히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성도들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 장대비를 맞고도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던 준비위원들의 수고를 생각하니 도저히 울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기공 예배는 은혜와 감동으로 끝났다. 모든 성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 탑승하자 그때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도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아, 기적이었구나. 모든 과정이 은혜였구나. 새에덴교회를 위한 위대한 하나님의 기적이었어. 만약 햇볕이 쨍쨍 내리쬐었더라면 우리가 한 시간 넘도록 앉아 있었어야 했을 텐데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는 그쳐 주시고 구름 기둥으로 우리를 가려 주셨다. 쌍무지개까지 뜨게 하셨으니 이런 기적이 어디 또 있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내 가슴은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바로 그 순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감동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새 예배당 건축은 오직 은혜로만 진행될 것이다. 한순간도 나의 힘과 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한다.”

기공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과 악수하면서 마음으로 주님께 고백했다. “주님, 알겠습니다. 정말 주님만 의지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만 사모하며 기다리는 종이 되겠습니다. 한순간도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현재의 새에덴교회 성전.

그렇게 새 예배당 공사는 은혜로 시작됐다. 왜 도중에 어려움이 없고 역경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때그때 하나님께 엎드리고 은혜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성도들에게 꿈의 꽃씨를 심어주었다. 그랬을 때 건축현장에 하나님의 은혜가 물 붓듯 임했고 성도들은 눈물로 씨를 뿌리며 헌신의 꽃을 피웠다. 그렇게 점점 새 예배당은 모양을 갖춰갔다.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간교한 질문으로 접근하는 사탄


사탄은 우리에게 간교한 질문을 통해 접근한다. 마귀는 하와를 홀로 선악과나무 아래로 유인한 다음 간교한 질문부터 했다. 그 질문의 목적은 하와에게 무슨 틈이 없나 살펴보고 하와가 엉뚱한 호기심과 그럴듯한 오해와 갈등, 회의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탄은 먼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질문하며 떠본다.(창 3:1) 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답했다.(창 3:2~3)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시켜버렸다. 그만큼 하와는 허점을 갖고 있었고 선악과를 향한 호기심과 매력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귀가 4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와야, 그것을 따 먹는다고 죽지 않아. 절대 죽지 않아.”

오늘날도 사탄은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접근한다. 어떤 사람을 통해 무슨 빈틈이 없나 떠본다. “집사님은 교회 안의 이런저런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 교회가 이렇게 운영되고 교회 일이 저렇게 처리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견 교환이나 교제를 목적으로 대화할 수도 있다.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생각과 의식이 성숙해 가며 시야가 넓어진다. 그러나 사탄은 그런 긍정적인 의미의 질문이 아니라 빈틈을 노리고 틈만 보이면 사람을 공격하고 넘어뜨리기 위해 간교하게 물어본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부정적인 의미에서 선악과나무에 가까이 오게 하고 그 나무 아래 있게 한다. 그러다가 틈만 보이면 공격을 한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아무리 불평하고 원망하며 불순종해도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불평하면 당장 죽는 줄 알았다. 주일을 빼먹고 십일조 안 하면 당장 망하는 줄 알았다. 주의 종과 싸우고 교회를 상대로 다투면 망하고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사탄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목회자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한다. 그런다고 절대로 망하거나 죽지 않는다고 한다.

잘못된 것은 고치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을 생명으로 하지 않고 선악으로 하게 한다. 성령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지만, 사탄은 항상 선악을 알게 하고 선악으로 행하게 한다. 그렇게 하려고 사탄은 우리의 빈틈을 노린다. 틈만 보이면 헷갈리게 하고 넘어지게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말로 하와를 공격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절대 죽지 않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한 것이다.(창 3:4~5) 오늘날도 사탄은 우리를 떠보고 빈틈만 보이면 하나님 말씀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로 공격해 온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사람들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 생명을 보지 못하고 선악의 노예가 된다. 세속적 윤리와 도덕에 눈이 가려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못하고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한다.

윤리와 도덕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시민사회를 이루기 위해 윤리와 도덕을 잘 지켜야 한다. 아니, 우리는 더 잘 지켜야 한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의식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못하고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한다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율법조차도 복음으로 안내하는 초등교사요, 복음을 세우기 위한 구원사의 한 과정에서 주어진 것이다.(갈 3:24)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 안에 있는 생명의 본질, 생명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 껍데기만 붙잡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그런 비극에 빠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오늘날 현대인도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생명과 은혜로 충만해야 한다. 선악으로 눈이 밝아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생명으로 충만하는 것이다.


소강석 목사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