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가을, 서울에 사는 수필가 이경희(88)씨에게 소포꾸러미가 배달된다. 발신자는 뉴욕의 백남준(1932∼2006) 작가. 둘은 유년 시절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애국유치원을 함께 다녔다. 한국을 떠난 지 35년 만인 1984년 금의환향하듯 한국을 찾은 백남준은 김포공항에서 기자들에게 “유치원 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고 했었다.

꾸러미 속에는 사진에 백남준이 뭔가를 휘갈겨 쓴 73장의 드로잉(사진)이 들어 있었다. 일종의 그라피티 아트라고나 할까. 백남준은 왜 이걸 보냈을까. 시점이 중요하다. 그해 봄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남준은 재활치료 끝에 회복에 성공했고, 이후 시도한 첫 작품이 그것이다.

백남준은 비디오 설치 앞의 누드 퍼포먼스 이미지, 할아버지의 장례식 이미지, 존 케이지 등과 함께 활동하던 젊은 날의 사진 이미지 등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 사진의 여백 위에 글자를 썼다. ‘자, 밥 먹자’ ‘칙칙폭폭 기차가 떠난다’ ‘뚱뚱보’ 등등. 이 문장은 두 사람만이 아는 유년의 기호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뚱뚱보는 백남준의 동갑내기 사촌을 말한다. 둘은 그렇게 그를 놀려먹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글로벌 노마드족의 면모가 강했다. 하지만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한 후 세계관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자신의 본향에 대해 끌림이 생겼을 테고, 그것이 유년의 친구 이경희를 소환하며, 이런 작품의 탄생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백남준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지금껏 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고, 앞으로도 다시 하지 않을 거야.” 2010년 포항시립미술관 개관 기념전 때 처음 공개된 그 소묘가 이번에 ‘백남준의 드로잉 편지’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나왔다. 책은 태학사와 도서출판 광장에서 함께 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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