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의학 칼럼]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자를 광야로 이끄실까


열왕기상 19장 10절에는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엘리야의 기도다. 이 기도를 통해 ‘누구나 고독하다’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람은 고독한 감정에 사로잡혀 결국 죽고 싶다는 본능에 무릎 꿇는다. 고독은 사실 모든 감정의 종착역이다. 엘리야를 보자. 갈멜산에서 850대 1로 싸워 이긴 사람으로 보통 능력자가 아니다. 그런데 그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하자 광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신세한탄을 하며 죽으려고 한다. 오늘 본문 내용처럼 엘리야는 자신이 홀로 남았다고 호소했다. 그 또한 고독해진 것이다.

대문호 헤밍웨이는 어떤가. 많은 명저를 남겼다. 명성도 얻었고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는 유서 한 장 남기고 허무하게 떠났다.

고독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마치 나와 관계없이 저 멀리 있다 손님처럼 날 찾는 걸까. 그렇지 않다. 고독은 숙명이다. 숙명이란 운명보다 강하다. 운명은 무언가 정해져 있다는 개념으로 내가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숙명은 다르다. 이미 정해져 있고 거부할 수도 없는 걸 말한다. 죽음이 숙명이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고독도 인간의 숙명이다.

유럽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한계 상황을 이야기했는데 그 첫 번째가 고독이었다. 철학자들도 고독은 인간이 피할 수 없고 인간의 절대적 한계라고 본 것이었다.

독일에는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어느 한 사람도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라는 시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가슴에 와닿는다. 외로움과 고독한 감정은 우리 인간에게 숙명이다. 절대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고독만 가득한 광야로 인도하신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결국 이 세상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광야로 이끄는 건 고독이란 숙명을 대면하게 하시려는 뜻에서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 고독했다. 모세도 고독했다.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도 사실 고독한 삶을 살았다. 바울은 어떤가. 예수님의 제자들도 고독이란 숙명과 마주했다. 다만 이를 피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고독한 가운데 사명을 감당한 것이었다.

고독하지 않은 사람의 삶은 아름답지 않다. 감동적이지도 않다. 자신의 삶을 통해 상대방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 수도 없다. 고독을 대면하고 자기 길을 걷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주신 사명을 붙든 채 좌고우면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우리 가슴을 여미게 하는 감동의 주인공이다.

고독이란 숙명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돼야 한다. 하나님이 아니고선 절대 고독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지해야 한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다. 하나님의 가슴도 미어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오늘 하루도 어김없이 고독한 삶을 산다. 그 고독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음성을 느껴보시길 권한다.

이창우 박사(선한목자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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