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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삶의 프레임을 바꿀 때


“삶에 정말 의미가 있나요?” 한 젊은이가 음울한 목소리로 던진 질문이다. 기성세대로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질문 속에는 그가 감내해야 했던 씁쓸한 시간 경험이 응축되어 있다. 열심히, 멋지게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마치 장벽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 그는 절망한 것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자기 삶을 기획할 수 없다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일마다 안 될 때야말로 ‘의미-물음’ 앞에 서는 때이다.

“죽은 자에게 바칠 꽃을 들고 서 있는데/벌이 날아와 앉네”. 백무산의 ‘조문’이라는 시의 첫 연이다. 어떤 형태로든 인연을 맺어왔던 이의 죽음 앞에서 비감함에 사로잡힌 채 조문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엉뚱하게 벌 한 마리가 날아와 꽃향기를 탐한다. 삶과 죽음, 영원과 소멸, 질서와 혼돈 사이의 경계에서 바장이고 있는 참에, 벌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일에 충실할 뿐이다. 그 무심한 현존, 마치 환영처럼 나타났다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그 벌 한 마리가 무거움에 이끌리는 영혼을 잠시 뒤흔든 것이다. 시인은 ‘앉네’라는 평서형 종결어미를 통해 독자들의 공감을 구하고 있다. 꺾여진 꽃조차 생명을 부르고, 한갓 미물로 여겼던 벌조차 제 삶에 충실한 데, 우리 삶은 어떠냐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삶의 의미란 애당초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세상은 그저 무심하고 무정한 공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히 이 세상에 와서 시간이 부여한 역할을 감당하다가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삶은 온통 우연의 연속이고, 그 우연을 연결하는 목적의 실 따위는 없기에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다. 이들은 생명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이라고 본다. 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는지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왜’라는 물음을 삿대로 삼아 시간의 바다를 헤쳐간다. 방향을 잃기도 하고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권태로운 시간을 견뎌야 할 때도 있지만 가야 할 곳을 알기에 멈추지 않는다. 삶의 부조리 앞에서 흔들릴 때도 있다. 무의미와 허무감에 확고하게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잠시 비틀거리다가도 다시 정신을 추스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라본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삶은 누구에게나 막막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삶의 시간을 구획하고 그 구획된 시간을 구체적인 목적으로 채우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그 충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이들은 사다리를 오르듯 한 칸 한 칸 올라가면서 자기 망각, 존재 망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사유하며 살 뿐이다. 세상 문법에 익숙해진 이들은 스스로 유능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길을 잃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바꾼다는 뜻이다. 욕망이 아닌 초월의 눈으로 사람과 사회와 역사를 바라볼 때 세상은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삶의 의미란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발견하고 구성해야 하는 과제이다. 인간의 인간됨은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함을 통해 형성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은 우리를 참 사람됨의 길로 안내하기 위해 보냄받은 이들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변 사람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앞서 인용한 백무산의 시 마지막 연이다. “벌은 하루 치의 삶에 몰두해 있고/죽은 자 앞에서 나는 벌겋게 삶에 취해 있고”. 시인은 ‘-고’라는 어미를 통해 삶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암담하고 답답한 세월이라 해도 인식과 사유의 틀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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