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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성범죄자가 판결에 웃는 나라

한승주 논설위원


미투가 들불처럼 번지고 n번방에 세상이 공분해도 권력층 남성들 성의식 미흡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는 사법부의 시대착오적 판결
디지털 성범죄 처벌 강화하고 판사들이 엄중하게 판결해야


한 사람은 그렇게 떠났고, 또 다른 사람은 세상에 남겨졌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듯 보였던 이의 극단적인 선택에 놀랐다. 항상 여성의 편에 선 것처럼 보였던 그가 ‘미투’로 고소를 당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폭로된 내용이 그동안 흔히 봐왔던 전형적인 직장 내 성추행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아서 참담했다. 여권 유력 인사들의 미투 사태 속에서도 그의 성추행은 계속됐다. 피해자가 주변에 도움을 호소했지만 묵살됐다. 미투가 들불처럼 번지고 온 세상이 ‘n번방’에 공분하는 동안에도 우리 사회 권력을 가진 남성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고소인이 절대 보안을 요구했던 성추행 고소 사실이 거의 실시간으로 피고소인에게 전달된 정황 앞에 큰 벽을 느낀다. 상대는 인구 약 1000만명의 사령탑인 거대 권력이다. 그 앞에 한 개인은 얼마나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으며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던 그에게 어떤 이들은 무심하게 돌을 던졌다. 겨우 용기를 낸 그 사람만 힘들었던 게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며 비슷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던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 함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6일 한 판결도 이런 종류의 분노 실망 허탈 무력감을 불러일으켰다. 법원이 국제 성범죄자 손정우(24)의 미국 송환을 불허하고 석방한 날이다. 손정우는 2015년 7월부터 2018년 3월까지 ‘웰컴 투 비디오’라는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 사이트를 운영했다. 수법은 악랄했다. 성인 포르노는 취급 안 한다는 문구를 내걸고 15세 이하에게만 집착했다. 생후 6개월 영아까지 범죄 대상으로 삼아 수십만건의 성착취물을 유통했다. 수억원을 챙겼다. 미국 영국 등 32개국이 나서서 수년간 공조수사한 끝에 손정우를 검거했다. 영상을 직접 제작한 영국인은 징역 22년형을 받았다. 미국에서도 관련 범죄자가 징역 5~20년형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 법원은 주범인 손정우에게 고작 1년6개월을 선고했다. 계란 18개를 훔친 생계형 범죄자에게 검찰이 구형한 것과 같은 형량이다.

손정우의 자금세탁 혐의에 대해 한국 검찰은 기소조차 안 했는데, 미국이 이 혐의로 범죄인 인도 요청을 했다. 미국에서 자금세탁은 최고 20년형이다. 불법 동영상 하나만 다운로드해도 5년형이니 그가 미국에 가면 중형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손정우가 미국에서 제대로 된 죗값을 받길 바라는 여론이 우세했다.

지난 10년 동안 법원이 외국의 범죄인 인도 송환 요청을 불허한 경우는 30건 중 단 1건, 정치범 사건이 유일했다. 그렇다 보니 그의 미국 송환을 예상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도 굳이 법원은 손정우가 미국으로 송환되면 관련 수사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며 송환을 불허했다. 판결 직후 손정우의 아버지는 “현명한 판단에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로 성난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성범죄자가 판결에 만족해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피해자는 죽지 못해 살고 있는데, 이미 형량을 채운 손정우는 이날 풀려났다.

우리 사법부가 유독 디지털 성범죄에 관대한 이유는 50대 이상 남성 판사들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야동’을 보는데 그게 뭐가 큰 죄가 되느냐는 시대착오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러니 ‘성범죄는 사법부도 공범’이라는 비난까지 나오는 것이다. 억울하면 사법부가 확 달라져야 한다.

우선 범죄자를 보다 엄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양형기준을 올려야 한다. 그나마 있는 양형기준도 이런저런 사정을 참작해 형량을 깎아준 게 우리 사법부다. 이번 손정우의 석방을 보고 n번방 운영자 조주빈은 희망을 봤을 것이다. 그도 매일같이 반성문을 쓰고 있다는데 유난히 가해자 남성의 인권을 생각하는 판사들의 마음이 또 움직일지 모르겠다. 이러한 관대한 판결이 모여 n번방을 만든다. 이들이 사회에 나가면 미투 가해자가 될 공산이 크다. 손정우, n번방, 미투는 별개가 아닌 유기체로, 우리가 끊어야 할 나쁜 고리다.

합리적인 안이 마련되기 전에는 판사 개개인이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다. 손정우를 석방시킨 이는 강영수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다. 그의 대법관 후보 자격을 박탈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50만명 넘게 동의했다. 대법관 최종 후보자 결정이 다음 주로 다가왔다. 우리는 지켜볼 것이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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