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미술] 왕실목장→비행장→광장→금융허브… 파란만장 여의도 700년

⑮ 김수근과 한강종합개발계획

조선시대 왕실용 목장이었던 서울 여의도는 일제강점기 비행장를 거쳐 박정희 정권 때는 국회의사당과 광장의 이미지로, YS정부 들어서는 공원과 금융허브로 변신하는 등 시대에 따라 쓰임새가 변했다. 지난해 촬영한 여의도 항공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나? 여의도 살아.”

한때는 이렇게 말하는 게 서울 중산층의 표식이던 시절이 있었다. 압구정과 강남이 개발되기 전의 일이다. ‘시범아파트’를 위시해 최초의 고층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동네. ‘섬’이지만 섬인 게 더 장점이고, ‘서울의 배꼽’이라며 주민들이 자부심에 겨워 말하던 동네. 그 여의도는 조선 시대에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던 곳이다. 대신 왕실에서 쓰는 말과 염소, 양이 한가롭게 뛰놀았으니 실로 상전벽해다. 조선 전기 이래 ‘사축서’(왕실용 짐승을 관리하던 관아)의 목장이 있었던 여의도는 어떻게 21세기 한국의 맨해튼이 됐을까.

근현대사를 거치며 파란만장했던 여의도의 변천사를 서울역사박물관이 최근 발간한 지역조사 결과보고서 ‘여의도, 방송과 금융의 중심지’를 통해 살펴본다.

왕실 목장에서 최초의 비행장으로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여의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가운데 도성도에는 한강과 샛강에 면해 여의도(汝矣島)와 율도(栗島·밤섬)가 또렷하게 표시돼 있다. 이 가운데 여의도는 큰섬 혹은 너의섬, 나의 섬이라는 의미의 너븐섬, 넙섬, 너른섬, 너섬 등으로 불렸다. 조선왕조실록엔 ‘잉화도’(仍火島), ‘잉외도’(仍外島) 등으로 기록됐다. 고립되고 폐쇄된 섬이라 명종 11년엔 족친끼리 결혼하는 ‘추잡한 풍속’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섬의 운명이 바뀐 건 일제강점기 들어서다. 1916년부터 비행장이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다. 일본군이 여의도를 군용지로 매수하면서 당시 100여 호의 주민은 퇴거해야 했다. 68년 여의도 건설용 자재로 사용되기 위해 폭파된 밤섬 이주민 전에 여의도 이주민의 유랑사가 있었다.

처음엔 용산 일본기지 조선군 20사단 군 비행장으로 사용됐고 나중에 민항이 들어왔다. 22년 한국인 비행사 안창남이 3만여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역사적 비행에 나선 곳도, 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식민지 청년 손기정을 태운 귀국 비행기가 도착한 곳도 여의도 비행장이었다. 37년 간송 전형필이 일본에서 개업한 영국인 변호사 개스비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사려고 흥분에 젖어 도쿄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간 곳도 여의도 비행장이었다. 38년에 유진오가 쓴 소설 ‘창랑전기’가 보여주듯 여의도 비행장은 근대로, 미래로 나아가는 창이었다. 이곳은 해방과 함께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 등 국외 망명 주요 인사의 귀국 루트이기도 했다. 그렇게 여의도는 제 온몸으로 해방의 기쁨을 목도했다.

55년 여의도기지 반환을 기념해 공군이 주관한 어린이 행사.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여의도 비행장 시대’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여의도 공군 기지는 미군에 의해 접수됐고 한국 공군은 55년에야 기지를 반환받을 수 있었다. 여의도의 국제공항 기능은 61년 김포로 완전히 넘어갔다.

광장선 관제 행사부터 종교집회, 이산가족찾기까지

박정희 시대와 더불어 여의도의 운명은 다시 바뀐다. 지금의 여의도 뼈대가 갖춰진 것이 이때다. 여의도 개발사에서 서울시장 김현옥과 건축가 김수근을 빼놓을 수 없다. 66년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김현옥이 시장에 부임하며 한강종합개발계획을 구상했고 젊은 건축가 김수근 등이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를 이끌며 계획도시 여의도를 설계했다.

68년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참석한 윤중제 준공식.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불도저 시장’ 김현옥은 건설부도 제치고 대통령에게 직보하며 여의도 개발을 시작했다. 67년 12월 27일 역사적인 윤중제(여의도 제방 도로) 공사 기공식이 거행됐다. 밤섬을 폭파해 얻은 골재로 윤중제를 뚝딱 지었고, 그렇게 해서 더 커진 여의도 땅에 국회의사당과 고층의 업무시설, 최첨단의 아파트 단지가 차곡차곡 생겨났다. 70년 5월 서울대교(현 마포대교)가 준공되면서 여의도는 비로소 섬을 벗어났다.

김수근이 기획한 광장은 경기장, 미술관, 음악당, 동·식물원 등을 갖춘 도시공원의 개념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통령 박정희는 그저 광활한 광장을 원했다. 39만6700㎡(12만평) 부지에 잔디도 나무도 없이 아스팔트로 포장한 ‘5·16광장’은 그렇게 71년 9월 탄생했다. 김일성 광장의 5배 규모였다. 당시의 남북 긴장 관계를 고려하면 전시 군용 활주로를 염두에 뒀거나 군사 퍼레이드를 위한 체제 과시용으로 조성했을 거로 추정이 된다. 그러니 이곳은 ‘박정희의 광장’이었다. 이곳에선 베트남 파병 행사, 국군의 날 기념식 행사 등 정부 행사나 방첩 및 승공 국민 총궐기 대회 등 관제 집회가 열렸다. 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대회가 열리는 등 종교 행사의 무대이기도 했다. 84년, 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차례 방한 행사도 이 광장에서 치러졌다.

70년대 여의도순복음교회.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80년 들어선 전두환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광장 명칭부터 ‘여의도광장’으로 바꿨다. 광장의 이미지도 바꾸고자 했다. 문화축제 ‘국풍81’(81년), KBS가 주관한 남북이산가족찾기 방송(83년) 등이 전두환 시대 열렸다.

87년 대통령 선거 유세가 열린 이래 여의도광장은 민주화 시위의 단골 장소였다. 그러다 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용도 변경이 이뤄져 99년에 공원이 됐다. 점심이면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이 거북목을 풀며 산보하는 곳이 됐는데, 회사가 여의도인 나도 그런 산보객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김수근의 안대로라면 국회의사당 말고도 시청과 대법원까지 여기 와야 됐다. 시청과 대법원 이전이 좌절되며 방송과 금융이 빈자리를 메웠다. KBS를 필두로 TBC, MBC등 방송사가 들어서며 여의도는 방송의 메카가 됐다. 서대문에 있던 순복음교회도 여의도 시대를 열며 한국 교회의 새역사를 썼다. 시청사 부지에는 한국산업은행 본점, 중소기업회관, 수출입은행이 들어섰다. 85년 들어선 대한생명 63빌딩은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을 바꿨다. 당시 동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83년 이산가족찾기 KBS본관 앞.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원래 금융의 중심은 명동이었다. 그러나 여의도 개발과 함께 78년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이, 79년 한국증권거래소가 명동에서 여의도로 이사 왔다. 증권사들도 여의도 이전이 불가피했다. 그렇게 여의도는 한국의 월가가 됐다.

직장인 쪽잠 풍속도…주민의 강한 고향 의식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의 고향 여의도는 독특한 지역 풍속도를 탄생시켰다. 여의도백화점 지하 ‘여백노래방’은 초 단위를 다투는 주식 매매에 지친 증권맨들이 점심시간 쪽잠을 자는 장소로 대여됐다. 그것이 진화돼 IFC몰에 있는 여의도 CGV는 관람객이 없는 낮, 영화관에서 낮잠을 즐길 수 있는 ‘프리미엄 시에스타’를 운영하기도 했다.

여의도는 한국 최초의 신도시다. 1971년 10월 준공한 시범아파트는 강남 개발에 앞서 고층아파트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이 무렵 일어난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를 기점으로 정부의 아파트 공급 정책이 서민층에서 중산층으로 전환하던 때였다. 이후 70년대 내내 삼익, 한양, 삼부토건, 라이프주택 등의 건설회사에 의해 민간아파트가 잇달아 건설되며 여의도는 중산층의 거주지가 됐다. 주민 구성은 고졸과 대졸의 공무원과 군인 가족, 회사원이 많은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

“여의도에 산다고 하면 계급을 다르게 생각했어요. 지금 봐도 그래요. 기업 사장도 있었고, (광장아파트) 우리 줄에는 컴퓨터 회사 사장도 살고, 큰 병원의 원장도 살았고요. 동네 사람들이 만나는데 무슨 호텔에서 저녁이나 먹고…”

광장아파트에 살았던 의사 홍윤철(60) 씨의 회상은 은근한 자부심을 보여준다. 여의도 사람들은 강남 사람보다 고향 의식이 강하다.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며 여의도 안에서 쇼핑과 병원, 학교 등 모든 것이 가능한 독특한 환경 덕분이다. 여의도의 초중고를 지역 사람만 다닐 수 있게 한 ‘특수학군제’도 고향 의식, 동창 의식을 강화했다. 노량진 재수학원에 다니며 처음으로 여의도를 벗어났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강남과 목동, 분당의 개발로 주거지로서 여의도의 위상은 약화했다. 이제 인공지능의 개막으로 금융중심지의 역할도 위협받는다. 서울시립대 염복규 교수는 “여의도는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매번 권력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기능이 부과되며 발전해왔다”고 말했다. 여의도의 쓸모는 앞으로 어떻게 바뀔까.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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