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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박원순 사건 올바로 매듭지으려면

라동철 논설위원


무죄추정 원칙 거론하며 피해자중심의 해결 비난하는 2차 가해 당장 중단하길
국가인권위 등 관련 기관 성추행 사건 진상 밝히고
직장내 성범죄 방지할 실효성 있는 제도개선 방안 마련해야

칼럼의 주제로 박원순 성추행 의혹 사건은 피해 가고 싶었다. 출입기자로 맺은 인연이 조금은 있고, 박 전 서울시장의 시정 철학과 정책들에 대체로 공감하고 지지해 온 편이다. 호감을 가졌던 이의 불행한, 그것도 부끄러운 결말을 거론해야 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감정에 사로잡혀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KBS 이소정 앵커의 하차를 요구하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에 하루 만에 1만명 이상이 동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생각을 바꿨다.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침묵하는 건 어처구니없고 무례한 주장을 방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앵커는 지난 16일 KBS ‘뉴스9’에서 정세랑 작가의 소설에 나온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란 문구를 소개한 후 박 전 시장 사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현상을 비판했다. 이어 “피해자의 고통을 염두에 두고 진실을 찾아가는 것,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격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공감되는 내용이고 뉴스 진행자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청원인은 조사 중인 사안을 결론이 난 것처럼 호도해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고, 공영방송의 중립성을 지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들고나온 것인데 실체적 측면에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박 전 시장은 고소 사실을 접하고 몇몇 측근들과 얘기를 나눈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그 파장을 감당하기 두려웠거나 자책감에 빠져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죽음으로 그가 놓아버려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변명할 만한, 상대가 오해했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면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는 안전한 법정에서 박 전 시장에게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힘들다고 울부짖고, 용서하고 싶었다’고 했다. “법의 심판을 받고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다”고도 했다. 그럴 기회를 아예 차단한 것은 박 전 시장이다. 그의 죽음이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이번 사건은 직장 내 성추행·성희롱이 얼마나 뿌리 깊은 적폐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줬다. 박 전 시장이 누구인가. 1993년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의 변론을 통해 국내에 생소했던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이슈화했고, 다수의 여성 인권 침해 사건 변호사로 활동했다. 여성 인권 문제에 누구 못지않게 진보적인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시장이 된 후에는 여성의 시정 참여를 확대하고 다양한 여성 친화적 정책들을 추진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그가 성추행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충격이다. 여성 인권을 그토록 강조한 그였지만 자신의 일상에서는 실천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그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며 가해자를 비호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공개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직장인 2000명 가운데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는 응답자가 42.5%였다. 신고가 접수되면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진상을 밝히고 가해자를 엄벌해야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피해자 법률대리인과 여성단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에 착수한다. 피해자 측은 박 전 시장의 성희롱·성추행 의혹, 서울시 관계자들의 묵인·방조 의혹, 고소 사실 유출 경위 등을 규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2차 가해에 대한 국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조치, 선출직 공무원의 성범죄에 대한 견제조치 마련 등 제도개선도 요구했다.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조사를 벌여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직장 내 성범죄를 줄일 실효성 있는 대책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피해자는 “저와 제 가족의 고통의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2차 가해란 논란 속에서도 박 전 시장을 애도할 기회와 시간은 주어졌었다. 이제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줘야 할 때다. 국가인권위도, 수사기관도, 여성가족부도, 정치권도, 대통령도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피해자가 명예를 회복하고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야 한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의무이다. 지금도 어느 직장에서 성범죄에 노출되고도 어찌할 바를 몰라 속만 태우는 모든 피해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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