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만년야당 선비정신 되찾아야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만년야당’이란 표현이 요즘엔 주로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국민 지지를 얻지 못하고 수권(受權) 능력을 결여한 정당을 개탄하거나 조롱할 때 “○○당 이대론 만년야당 못 벗어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 기억에 1960, 70년대에는 이 표현에 긍정적인 뉘앙스가 붙어 있었다. 항상 권력의 반대쪽에 서서 독재를 비판하는 용기 있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훈장과 같은 수식어였다. 누가 집권하든 꼬장꼬장 지조를 지키며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고지식하고 자존심 센 선비를 일컬을 때 은근히 존경심을 담아 쓰는 말이었다. ‘만년여당’ ‘해바라기’ ‘어용’ ‘관변’ 등 경멸적 함의의 단어들과 대척점에 있었다. 학자, 언론인, 변호사, 작가, 사회운동가 등 소위 식자(識者)층은 이 표현 듣는 것을 내심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이러한 긍정적 용례가 오늘날엔 드물어졌다. 비판적 선비정신을 줄곧 견지하는 사람이 잘 드러나지 않는 세태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근래 우리 사회의 여론과 담론을 이끄는 식자층은 정치권의 양극적 진영논리에 따라 어느 한쪽 편만 거들거나 공격할 뿐 집권세력과 상관 없이 일관되게 비판의 견제구를 날리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로 비판적 선비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느 한편의 진영논리를 따르는 정파적 주장이 주목을 받고 항구적 비판의식에 입각한 지적은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만년야당 기질의 선비가 올곧게 비판정신을 발휘해도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에 의해 오해받고 이분법적 정쟁의 한쪽으로 싸잡아 묻혀버리기 때문일지 모른다.

필자의 얕은 소양으로 감히 말하자면, 선비정신의 핵심 중 하나로 ‘억강부약(抑强扶弱)’을 들 수 있다.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준다는 뜻이다. 어느 편의 누가 권력을 잡든 힘센 집권 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억강부약’을 실천하면 만년야당이 될 수밖에 없다. 선비의 전형적 이미지로 행색은 초라하고 곤궁해도 권력층에 시비 걸기를 마다하지 않는 대쪽 딸깍발이가 떠오르는 이유다. 선비가 간혹 관직에 나가는 경우에도 권력에 무조건 휩쓸려가지 않고 지조를 지켜 쓴소리를 내거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때 선비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우리나라가 온갖 역사의 굴곡을 넘어 민주국가 반열에 오르는 데에 과거 만년야당 선비 같은 분들이 큰 공헌을 했다.

서양에서도 자유주의 사조가 절대왕권으로부터 개인을 지키려는 취지로 발흥한 것인 만큼 정부 권력에 대한 만년야당식 견제의식과 저항정신이 소중하게 떠받들어진다. 좌우 정권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돌직구를 날리는 언론인 등 지식인은 양심의 표상이자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존경받는다. 석학인 요한 갈퉁은 지식인의 역할은 노선과 상관없이 약자를 편들고 강자를 비판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억강부약의 서양판 선비정신이라 하겠다.

한 사회가 진정한 변혁과 발전을 이루려면 만년야당 식자층이 계속 큰소리를 내야 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을 탈바꿈시킨 혁신주의운동은 초당파적인 법조인, 언론인, 교사, 작가, 사회운동가, 기술자, 학자 등 식자층이 정권에 상관없이 한 세대에 걸쳐 각종 사회 문제의 고발과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 덕에 성공할 수 있었다. 공화당이나 민주당에 속한 정파적 인사들만으론 보스정치, 정치부패, 비민주적 제도, 경제 불공정과 비효율, 빈부격차, 아동노동, 여성차별, 열악한 작업환경, 도시범죄 등 당시 미국의 수많은 고질병을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합리주의, 과학주의, 민주주의, 도덕주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앞장서서 끈질기게 쓴소리를 퍼부은 만년야당 인물들의 공이 컸다.

21세기 한국에도 만년야당형 사람들이 필요하다. 정치권은 다양한 생각을 흑백으로 가르는 이분법적 진영논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편 아니면 원수다. 식자층마저 이 양극적 탁류에 휩쓸리면 곤란하다. 오해나 탄압을 받아도 강한 측에 항시 견제의 비판을 가하는 꼬장꼬장한 사람들이 언론계, 시민단체, 법조계, 학계, 교육계에서 나서야 한다. 정파적 보복의 악순환에 빠진 양극적 정치권이 스스로 바뀌기를 기대할 순 없다. 만년야당 선비정신이 넘쳐나면서 자극을 가해야 정치권도 정파 환원주의와 경직된 집단주의를 자제하고 권력층에서도 선비다운 인물들이 나오지 않을까.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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