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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맛은 모르겠고 재미는 있어야

문수정 산업부 차장


아이들에게 가장 먹이기 힘든 것 중 하나는 ‘파’다. 설렁탕을 먹일 때면 파를 골라내고 줘야 한다. 어쩌다 작은 파 조각이 밥에 섞여 들어가도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감지해내고 혀를 이리저리 굴려대다 뱉어낸다(부모는 화가 난다). 식감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어린아이들에게 파는 참 매력 없는 식재료다. 파는 그런 거다. 썩 친해지기 힘든 것, 나이 든 뒤에나 겨우 좋아지는 식재료. 아이는 훗날 국이나 찌개에서 더 이상 파를 골라내지 않게 되면 그제야 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파의 맛 나는 시리얼이 인기다. 농심켈로그에서 지난 6월 말 출시한 ‘첵스 파맛’은 일부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품절 사태를 빚었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서는 ‘첵스 파맛’ 관련 게시물이 1개월여 사이 5000개 이상 올라왔다. 유튜브에 공개된 ‘첵스 파맛’ 광고는 6일 오후 3시 기준 247만뷰를 찍었다. 이상한 맛 시리얼이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줄이야. 그런데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재밌는 일로 회자되고 있다.

지인 중 한 명은 페이스북에서 첵스 파맛이라는 문구를 보고 ‘파맛? 내가 모르는 외국어인가 10대들의 신조어인가’ 한참 고민했다고 한다. 파맛은 그냥 ‘파의 맛’이라고 알려줬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진지하게, 대파가 시리얼 재료로 소량 들어갔고 대파의 맛을 구현하기 위해 연구팀에서 몇 년 동안 틈틈이 연구해 왔다고 전했다. 그는 내게 ‘아니 왜…’라고 되물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첵스 파맛의 출시 사연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심켈로그가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재밌는 이벤트를 했다. 첵스 초코맛과 파맛 가운데 어떤 제품을 출시할 것인지 ‘첵스 나라 대통령 선거로 결정한다’는 소비자 투표를 진행했다. 초코맛의 압승을 떠올리며 시작한 이 이벤트는 파맛에 투표가 몰리면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일이 커져 버렸다. 농심켈로그 측은 이를 부정 선거로 문제 삼으며 중복 투표를 걸러냈고, 온라인으로 진행하던 투표 방식에 오프라인을 추가하는 등 초코의 승리로 몰아갔다. 소비자들은 ‘독재 타도’를 외쳤지만 결국 초코의 승리로 끝났고 파맛은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았다.

16년 전 벌어진 이 해프닝은 놀랍게도 잊히지 않았다. 소비자들은 이 투표 이후 농심켈로그 온라인 홈페이지 등을 통해 끊임없이 ‘파맛’을 출시해 달라고 요구했다. 맛이 궁금하다는 것에서부터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까지 이유도 다양했다. 첵스 파맛 출시가 예고되자 이 내용을 기억하고 있던 소비자들은 “16년 만에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며 기뻐했고, 출시되자마자 시식 후기와 각종 활용법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했다. 농심켈로그는 2004년부터 파맛 출시를 고민했으나 대파가 들어가도 맛있는 시리얼을 구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단 올여름 한정판으로 출시했고 소비자 반응을 살핀 뒤 정식 출시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소비자들의 특이한 요구에 16년 만이기는 하지만 기꺼이 화답한 기업까지, 재밌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이유랄 게 없더라는 게 결론이다. 재밌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니까. 농심켈로그는 ‘우리를 재밌게 해 달라’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답했고, 그 결과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재밌게 사는 건 중요하다. 대단히 재밌는 일을 찾기 힘든 요즘, 소소한 재미들이 삶의 고단한 빈틈을 채워준다. 식품기업들은 맛에 재미까지 갖춰야 해서 고달플 것 같지만 말이다.

문수정 산업부 차장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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