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푸어 난리 때 망설이다 서울에 집 안 산 것 가장 후회”

[유동성 파티, 불안한 내 돈] ① 넘쳐나는 돈을 좇는 사람들

글로벌 경제가 유동성(流動性)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다. 세계 각국은 코로나19 쇼크로 기업과 개인이 ‘돈맥(脈)경화’에 빠지지 않도록 막대한 돈을 시장에 쏟아냈다. 너나 할 것 없이 금리를 0%대로 낮췄다. 이로 인해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풀린 돈이 부동산·주식·금 등에만 쏠리며 계층 갈등과 양극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경제의 혈류를 뚫기 위해 찍어낸 돈은 우리의 삶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유동성의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자산 격차를 결정지은 건 순간의 선택이었다. 2010년 한 무역회사에 입사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태형(가명·37)씨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거요? 2015년 서울에 집 산 거죠.” 그의 신혼집은 서울 부도심 24평 아파트 전세였다. 2년 후 집 주인은 “시세에 맞추겠다”며 전세보증금을 8000만원 올렸다.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 당시 집값과 전셋값의 차이는 불과 1억원 수준. 아내와 상의 끝에 인근 아파트를 6억원에 샀다. 5년이 흐른 지금, 이씨가 산 집의 가격은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수년 치 연봉을 안 쓰고 모아야 쥘 수 있는 돈을 평가 차익으로 거둔 셈이다. “지금은 그때 집 주인한테 감사하게 생각해요. 계속 전세에 살았다면 어땠을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부동산 문제는 결국 수년 전 ‘집을 샀느냐, 안(못) 샀느냐’로 귀결된다. 엄밀히 따지면 ‘서울 아파트’를 샀는지 여부로 갈린다. 서울 아파트를 샀다면 자산 증식이란 수혜를 경험하고, 그렇지 않았다면 제자리걸음을 걸었다는 것이다.


이씨와 같은 해에 입사한 강민호(가명·38)씨는 “집을 안 산 게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2017년 강씨가 결혼할 당시 서울 아파트의 매매 중위가격(중간값)은 6억원이 넘었다. 불과 3~4년 전 ‘하우스 푸어’(무리한 대출로 인한 이자 부담 때문에 집을 보유해도 빈곤하게 사는 사람들) 사태로 난리였는데, 집값이 너무 비싼 것 같았다. 망설인 사이 아파트 값은 9억원까지 뛰어올랐다. 강씨는 “돈도 없고 대출도 막혀 아파트 살 생각은 접었다”며 “평생의 기회를 놓쳤다는 후회가 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동산 광풍(狂風)의 요인으로 지목되는 건 바로 넘쳐나는 유동성이다. 수요 옥죄기에만 나선 정부의 실책도 집값 상승을 거들었지만, 근본적으로 낮은 은행 이자보다 높은 수익률을 추종하는 ‘돈의 행렬’이 집값을 올렸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친 2008년 10월 국내 정기적금 금리는 연 5.14%였다. 지금은 불과 1.23% 수준이다.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는 “과거 고금리·고성장 시대는 저축하는 사람에게 가장 유리하고 대출 받는 사람이 불리한 시기였다”며 “지금과 같은 저금리·저성장 시대에선 근로소득이 주력인 사람들도 투자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9일 말했다.

패러다임 전환에 기름을 부은 건 ‘코로나 쇼크’였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액세서리 도매업을 하는 박모(40)씨는 생전 처음 주식 계좌를 만들었다. 코로나 이전 1000만원까지 찍었던 월 매출은 70만~80만원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장사가 안 되자 주변 상인들 입에선 주식 얘기가 하나 둘 새어 나왔고, 시세 차익을 거둔 사례가 무용담처럼 퍼졌다. 박씨도 소위 ‘코로나 백신’ 테마주에 모아둔 돈 일부를 투자했다. “가게 매출과 적금 이자만 보다간 굶어 죽겠더라고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요.”

유동성이 넘치는 시대는 ‘근로소득을 모아 자산을 불린다’는 개념을 무너뜨리고 있다. 부동산뿐 아니라 주식, 금 가격까지 무섭게 치솟으면서다. 이달 들어 코스피지수는 2300선을 돌파하며 2018년 10월 이후 고점을 갈아치웠다. 코로나 쇼크가 불거진 지난 3월 대비 160%를 웃도는 수치다. 한국거래소 KRX금시장의 금 현물 1g 가격은 2018년 9월 4만3000원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8만원을 코앞에 두고 있다. 최근 2년 수익률로 보면 서울 부동산보다도 높다.

유동성 격변에 휩싸인 건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최근 미국에는 ‘로빈 후드’, 일본에선 ‘닌자 개미’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미국 젊은층이 로빈후드라는 주식투자 애플리케이션으로 투자에 뛰어들고, 일본의 온라인 주식 계좌 개설 건수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며 탄생한 용어들이다.

그러나 유동성이 자산 투자에만 쏠리며 실물을 왜곡하는 형국은 우려스럽다. 올 2분기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32.9%’로 76년 만에 최악의 수치를 기록했다. 일본도 올해 성장률이 -8%대로 떨어질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온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직장인 월급은 제자리인데 집값과 실업률은 올라가고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며 “정부가 임대주택을 늘리겠다는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효과가 미지수인 상황에서 청년 등이 느끼는 박탈감은 커지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지나친 불안감으로 인한 ‘패닉 바잉’(Panic Buying·공포에 의한 매수)에는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저금리’라는 인화물질이 뿌려진 형국이라는 것이다. 홍춘욱 대표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시점이 훗날 보면 위험한 때인 경우가 많았다”며 “공포심리에 쫓겨 투자에 나서는 건 정말 말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유동성 파티, 불안한 내 돈]
▶①-2“당분간 저금리… 일정 부분 위험자산에 투자” [유동성 파티, 불안한 내 돈]
▶①-3절박한 2030, 자나깨나 주식·부동산 생각 뿐 [유동성 파티, 불안한 내 돈]
▶②-1‘달러 바주카포’에도 돈맥경화… ‘자산 버블’ 더 커졌다
▶②-2금융위기 때는 ‘애플’로… 코로나에 풀린 돈은 ‘테슬라’로
▶③“증시 상승세 지속… ‘성장 기대감’ 주는 기업에 투자하라”

양민철 조민아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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