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바주카포’에도 돈맥경화… ‘자산 버블’ 더 커졌다

[유동성 파티, 불안한 내 돈] ②유동성 습격 12년-리먼에서 코로나까지

지난 5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한 직원이 달러를 세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경제 타격을 막기 위해 과감한 양적완화 조치로 달러를 시장에 풀면서 전 세계적으로 주식과 금 등 금융자산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말까지 ‘제로(0) 금리’를 유지하겠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제롬 파월 의장은 코로나19 대응책으로 ‘달러 바주카포’를 꺼내 들었다. 시장에 유동성이 마르고 기업과 개인이 파산하는 걸 막기 위해 대대적인 ‘돈 풀기’에 나선 것이다. 아예 제로 금리의 시한까지 못 박았다. 일본·유럽 중앙은행도 전격적 금리 인하와 채권 등 각종 자산 매입 등으로 시장에 현금을 수혈했다. 이러한 조치로 글로벌 금융시장은 안정을 되찾았고, 주가 지수도 반등세로 돌아섰다. 코로나19 쇼크로 촉발된 ‘경제 혼수상태’에서 잠시나마 깨어난 셈이다.

그러나 넘쳐나는 돈이 실물 경제와 자산 가격의 괴리를 키우면서 ‘유동성 함정’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유동성이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쓰이기보다 주식과 부동산 등에 쏠리며 ‘자산 버블(거품)’ 현상만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풀린 돈이 엉뚱한 곳에서 잠자고 있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통화량을 늘려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은 정말 괜찮은 걸까.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는 걸 나타내는 지표로 ‘화폐(통화)유통속도’ 하락을 꼽는다. 안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제가 1만원을 기름 넣는 데 썼다고 합시다. 주유소는 그 돈을 기름 사오는 데 쓰거나 직원들 월급을 줘요. 이렇게 되면 1만원이 두 번 돈 겁니다. 그런데 이 돈이 부동산과 같은 자산 시장으로 가버리면 소비로 연결되지 않아요. 그건 금융 거래지 실물 거래가 아니잖아요.”

화폐유통속도는 돈이 상품·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몇 번이나 사용됐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통상 호황기에는 속도가 증가하고 불황기에는 감소하는 경향을 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화폐유통속도는 꾸준히 하락 추세를 면치 못했다. 미국 M2(시중 통화량) 기준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1.9~2.0 수준을 오가던 화폐유통속도는 양적완화 이후 내림세를 거듭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올해 들어선 1.4에서 1.1로 급전직하했다.

국내 통화유통속도 역시 올 1분기 기준 0.64까지 떨어지며 한국은행 집계(2001년 12월 이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돈이 시장에서 돌지 않고 어딘가에 잠자고 있다는 뜻이다. 안 교수는 “실물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가격이 오르는 자산 시장으로만 돈이 쏠리며 나타난 현상”이라며 “부의 양극화가 커지면서 좋든 싫든 자산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 돈을 푸는 ‘양적완화’가 경제 위기의 해법으로 본격 등장한 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였다. 부실 대출이 쌓여 터진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해결책으로 미 연준은 화폐를 찍어내는 통화정책을 선택했다. 금융시장이 마비되고 각종 자산 가격이 급락하는 상황에서 경제를 다시 원활하게 돌리는 방법은 통화량을 늘리는 것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당시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은 “경기 부양을 위해서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겠다”는 발언으로 ‘헬리콥터 벤’이란 별명을 얻었다.


마구잡이로 돈을 뿌리는 정책은 놀랍게도 효과를 거뒀다. 급락했던 주가는 불과 1년여 만에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고, 미국 경제는 최강대국의 자리를 지켰다. 애플·아마존 등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기업들이 성장하며 미 증시는 10년 넘게 장기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반면 다른 길을 간 유럽 국가들의 형편은 달랐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08년 금융위기와 2012년 재정위기를 겪으며 양적완화 대신 ‘긴축’ 위주의 정책을 폈다. 빚으로 생긴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해결책은 결국 빚을 줄이는 것뿐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경기 회복은 더뎠고 침체는 장기화됐다. 끝내 저금리·저성장·저물가라는 일본식 불황에 빠지며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다.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은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적극적인 돈 풀기에 나서고 있다. 미국과 유럽·일본뿐 아니라 신흥국까지 양적완화에 팔을 걷어붙인 상황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크로아티아, 폴란드 등 유럽 중산층 국가를 비롯해 콜롬비아, 칠레 등 중남미 국가도 사상 최초의 돈 풀기 실험에 나섰다”며 “양적완화는 이제 세계화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과 자산 시장과의 괴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실물 경제는 맥을 못추는 데 주식과 부동산, 금과 같은 자산 가격은 무섭게 오르면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주립대 명예교수는 최근 미국 CNBC방송 인터뷰에서 “현재 미국 증시에 광기가 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상승 랠리에서 나만 소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FOMO·Fear of missing out)이 팽배해 있다”고 진단했다.

가장 단순한 해결책은 바로 ‘금리 인상’이다. 금리를 올리면 자산 시장에 과도하게 쏠린 자금의 물꼬를 자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이 더 큰 충격에 빠져 경기가 갑작스러운 침체에 빠져드는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 이제는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가 화폐를 무한정 찍어내야 한다는 이른바 ‘현대통화이론(MMT)’까지 등장한 상황이다.

안 교수는 “유동성 공급 감소는 결정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한다. “(유동성에) 한 번 불이 붙어버리면 끄기가 쉽지 않거든요. 금리를 올리면 한방에 해결되지만 그러면 실물 경제가 죽는 상황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문제예요.”

[유동성 파티, 불안한 내 돈]
▶①-1“하우스 푸어 난리 때 망설이다 서울에 집 안 산 것 가장 후회”
▶①-2“당분간 저금리… 일정 부분 위험자산에 투자” [유동성 파티, 불안한 내 돈]
▶①-3절박한 2030, 자나깨나 주식·부동산 생각 뿐 [유동성 파티, 불안한 내 돈]
▶②-2금융위기 때는 ‘애플’로… 코로나에 풀린 돈은 ‘테슬라’로
▶③“증시 상승세 지속… ‘성장 기대감’ 주는 기업에 투자하라”

양민철 조민아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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