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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이웃집 웬수’와의 동행

전정희 뉴콘텐츠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느슨하면 기어올라오고 꾸짖으면 쪼그라드는 것은 선인의 통유성이다.’

1919년 3월 30일자 일제 ‘고쿠민신문’ 2면에 이런 문장의 기사가 나온다. ‘조선통치의 요(要)’라는 제하의 기사는 ‘폭동(3·1만세운동)은 조만간 진정되거나 진압될 것이며 조선인은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세가와 조선 총독은 가혹하고 잔인한 수단을 쓰는 것에 신중하라’는 정치성 수사로 마무리했다. ‘고쿠민신문’은 대표적 어용 신문으로 군부와 번벌(藩閥)의 대변지가 되어 증병을 통한 3·1운동 진압을 부추겼다.

바로 이 문장이 오늘날까지 쓰이곤 한다. 이러한 논조에 순치된 우리나라 사람 일부가 정치 문제 또는 인간관계 문제에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선놈은 그저…”라며 내뱉는다. 온라인 댓글에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오늘이 광복 75주년이다. 1965년 ‘한일협정’ 조약 이후에도 두 나라의 관계는 경제력 차이로 동등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98년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을 허용하면서 우리가 조금씩 자신감을 느끼게 됐다. 그리고 2018년 우리 대법원이 일본 강제징용 기업에 대한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내린 후 양국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저들은 으레 “꾸짖으면 쪼그라들 줄” 알았는데 우리가 당당하게 나오자 적잖이 당황한 상태다. 우리는 원칙을 말한다. 그런데도 일본은 여전히 보복을 외치고 있다. 적반하장이다.

그들이 보복을 외치는 것은 ‘가혹하고 잔인한 수단’을 썼던 자신들의 반인간적, 반인류애적 작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고쿠민신문의 ‘가혹하고 잔인한 수단’은 악행을 스스로 인정한 바였다. ‘종군위안부’ ‘생체세균실험’ 등 한국과 아시아인들에게 행한 잔인함이다.

1940년 전후. 황해도 해주에 구세병원을 설립하고 복음을 전했던 닥터 셔우드 홀은 일제의 잔인함에 치를 떤 기억을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일제는 중국 본토에서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부상자를 후송했다. 연일 언론이 ‘전승’을 외쳤지만 지방 해주 병원에까지 환자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폐 질환이 급격히 퍼져 일반 병자와 의료진까지 숨졌다. 코로나19처럼 이름도 알 수 없는 전염병이었다. 군의관 장교가 셔우드를 군 병동으로 불렀다. 의료선교사들을 간첩으로 몰아붙여 축출하던 시기였다.

셔우드가 목격한 군 병동의 참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코, 귀가 잘리고 눈이 뽑힌 환자들…. 그렇다고 다 군인들도 아니었다. 특수 병동 문에는 ‘이 문으로 들어가는 환자들은 희망을 버릴 것’이라는 절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질겁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희한한 질병이었다. … 얇은 거즈 마스크가 우리를 더는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셔우드가 수석 군의관에게 말했다. “역병은 옛날부터 재앙입니다. 성경 사무엘상에도 3만여명이 죽을 정도로요. 옛날 같으면 흑사병입니다. 공기를 통해 옮기는 것이 더 무섭죠. 더 퍼지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실 만주 731부대의 페스트 등 세균 생물학실험 여파였다. 셔우드의 말에 수석 군의관은 자신도 걸릴까 돌같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군인 등 환자들에게 극비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셔우드는 조선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 간청했으나 끝내 거절당했다. 한국 전역에 전염병이 돌았고, 사람들은 병명도 모른 채 죽었다. 전시를 이유로 식민통치에 불리한 내용은 보도되지 않았다. 외국인과 친한 한국인은 이적행위자로 체포됐다. 셔우드는 추방됐다.

우리는 한때 일본 때문에 강한 분노와 울분을 안고 살았다. ‘이웃집 웬수’와의 동행이 쉽지 않았다. 특히 국가 간은 정치 문제가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그랬다. 하지만 한국 근대사를 들여다본 선교학자 셔우드 윗이 말했다. “한국은 영적 세계에 있어서 새로운 초강대국이다.” 생각의 그릇 차이다. 교착 상태의 한·일 문제를 풀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종교인들이 먼저 나설 때다.

전정희 뉴콘텐츠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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