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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풍경화] 두근두근 마수걸이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김수영 시인이 수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10개’를 꼽은 적 있다. 맨 앞에 고른 낱말이 ‘마수걸이’. 장사하는 사람들이 가게 문을 열어 가장 먼저 물건을 파는 일, 혹은 가장 먼저 손님을 받는 일을 “마수 걸었다” 말한다. 내가 알기로 장사를 해본 적 없는 꼿꼿한 시인께서 뜻밖에 ‘마수걸이’를 가장 좋아하는 말로 꼽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가장 먼저 맞이하는 일을 시인도 흥겹다 느끼셨나 보다. ‘아름다운 말’의 마수걸이로 마수걸이를 내거셨는지도!

1년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편의점에 어디 마수걸이가 있겠나. 동그라미에서 꼭짓점 찾는 격이다. 편의점의 마수걸이를 굳이 찾는다면 내가 근무하는 시간에 어떤 손님을 제일 먼저 맞는가 하는 것이다. 그날 첫 손님이 흥겨우면 온종일 흥겹고, 첫 손님에 마음이 상하면 근무시간 줄곧 모든 것이 무겁다. 첫 손님이 ‘큰’ 손님이면 그날 매출도 최고점 찍을 것 같고, 첫 손님이 그럭저럭이면 평범한 일상이 되겠구나 생각한다. 첫 손님에게서 하루를 점친다. 그래서 출근하며 마음속 주문을 왼다. 수리수리마수리, 오늘은 좋은 손님이 ‘일빠’로 찾아오시길!

회사 건물에 있는지라 24시간 영업을 하지 않는 우리 편의점엔 마수걸이가 있다. 그런데 날마다 마수를 열어주는 손님, 마수로 팔리는 상품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편의점 문을 열자마자 찾아오는 첫 손님은 십중팔구 경비업체 직원이거나 구내식당 조리사님들이시다. 지친 표정으로 들어와 냉장 쇼케이스에 들어 있는 자양강장제를 한 병 재빨리 꺼내든다. 또르륵 뚜껑을 돌려 벌컥벌컥 그 자리에서 원샷으로 들이켠다. 그런 풍경이 습관이 되어 “계산 먼저 하셔야죠”라는 말을 이젠 꺼내지 않는다. 나도 따라 꿀꺽, 침을 삼킨다. 밤새워 일한 당신, 그렇게 ‘들이켤’ 자격 있나니.

“그런데 아저씨, 이 음료수가 어떤 건 박카스 D이고 어떤 건 F인데 그 차이가 뭐예요?” 손님이 뜬금없이 그런 걸 묻는다. 드디어 기회가 왔도다! 그동안 인터넷을 뒤적여 섭렵해 놓았던 온갖 지식을 풀어놓을 시간이다. D는 성분이 어떻고 F는 어떻고, D는 약국에서 팔고 F는 편의점에서 팔고, 크기와 용량은 어떻고, 왜 그런 구분이 생겨났는지, 속사포처럼 ‘잡’학다식을 쏟아낸다. 손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더듬는다. “아, 아저씨, 제, 제약회사 다니셨어요?”

김수영 시인이 좋아하는 우리말 열 개 가운데 ‘에누리’도 끼어 있다. 알다시피 물건값을 얹거나 깎는 행위를 말한다. “에누리 없이 팔아요” 할 때, 그 에누리. 마수걸이에 이어 에누리까지 좋아하셨다니, 시인께서 사고파는 일에 꽤 관심이 많으셨나 보다. 박카스 D와 F의 차이를 묻는 손님에게 나는 마침표를 찍듯 이렇게 강조했다. “어쨌든 F가 제일 맛있어요!” 천연덕스럽게 기-승-전-판매로 이어지는 걸 보니 나도 이젠 장사꾼이 다 되어가나 보다. 오늘도 새벽공기 마시며 마수걸이하러 나간다. 에누리 가득한 하루가 펼쳐지길 기다린다. 첫 손님으로는 당신이 찾아오시길.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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