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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자생적 주택임대차 제도를
정부가 각종 규제로 개입해 시장에서 몰아내는 형국
한국인이 전세를 통해 누려온 여러 혜택이 사라지려 하는데
정부는 허둥지둥 월세 규제 여당선 “월세가 뭐가 나쁘냐”
헛웃음이 나온다

2011년의 전세 대란은 이상했다. 유럽발 경제위기에 부동산 시장이 잔뜩 침체했는데 전셋값만 폭등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집값이 더 떨어질 거라 생각한 사람들이 집을 사는 대신 전세를 찾았고, 정부가 보금자리주택 공급을 꺼낸 터라 그것을 기다리느라 또 전세를 찾았다. 전세 품귀 사태가 빚어지면서 전셋값 일부를 월세로 받는 반전세란 말이 처음 등장했다. 머잖아 전세가 사라진다는 소멸론도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당시 ‘전세의 운명’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해외에선 일본 오사카 한인 거주지에서나 비슷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는 한국의 독특한 주택 임대차 방식이 이 땅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고 그 앞날을 가늠하는 기사였다. 이런 단락이 있었다.

‘1960~70년대 서울역을 상상해보자. 먹고살기 힘든 시골에서 일자리 찾아 상경하는 사람들이 처음 서울과 만나는 곳. 가족을 이끈 가장의 보따리 깊숙한 자리에는 논밭 몇 마지기 팔아 마련한 전 재산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 돈의 액수는 너무 작았고, 동시에 너무 컸다. 서울에서 변변한 집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도시에서 살아갈 유일한 밑천이기에 쉽게 써버릴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을 절묘하게 헤아려준 것이 전세였다. 종잣돈을 지키면서 살 집을 구할 수 있도록.’

전세가 없었다면 한국의 산업화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공장은 도시에 있는데 노동력은 농촌에 있었다. 공장에 일손을 공급하려면 농촌 사람이 도시로 가서 살 집이 필요했다. 유럽은 공공주택을 보급해 해결했지만 한국의 가난한 정부는 그럴 여유가 없었을 때 정부를 대신해 주택을 싸게 제공해준 것이 전세였다. 당시 은행은 기업에 돈 대기 바빠서 개인에게 빌려줄 돈이 부족했다. 은행 문턱이 높았던 시절 전세는 집주인이 목돈을 마련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정부가 해주지 못하는 주거복지와 금융서비스를 국민이 부동산 시장에서 스스로 해결한 것. 전세제도가 정착한 과정은 그랬다.

2014년에도 전세 대란이 벌어졌다. 사상 최장인 76주 연속 전셋값이 올랐다. 이듬해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전국의 월세 가구 비율이 전세 가구를 처음 앞질렀을 만큼 전세의 월세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무렵 ‘전세의 운명’이란 제목의 칼럼을 다시 썼는데, 뭐랄까, 좀 아쉬운 마음에서 썼던 것 같다. 전세는 한국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하는 시스템이기도 했다. 살고 싶은 동네에 집을 사긴 어렵고 월세로 가자니 생활이 너무 쪼들려 난감할 때 우리는 전세를 택할 수 있었다. 집을 사고파는 큰일을 치르지 않아도 내 집 전세 주고 전셋집 구해 이사할 수 있었다. 전세 대란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인구 이동이 급감한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사하는 행렬이 갑자기 끊기는 현상은 전세가 제공하는 거주 이전 효과를 방증하는데, 그랬던 한 시대가 막을 내릴지 모른다, 집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지 모른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는 내용이었다.

2020년 다시 전세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월세 전환이 너무 빨라 정부가 전월세 전환율을 낮춰야 하는 지경이 됐다. 세 번째 쓰는 이 ‘전세의 운명’도 전세의 소멸을 걱정하는 것인데, 지난 두 글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2011, 2014년엔 전세가 시장 원리에 따라 퇴장하는 자연적 소멸을 걱정했지만, 지금 닥친 전세의 위기는 인위적 소멸에 가깝다. 전세 끼고 집 사는 걸 막는 정책이 전세 물량을 줄이고, 징벌에 가까운 세금이 전세를 월세로 바꿔놓고, 세입자 위한다는 임대차 3법이 전세의 씨를 말리고 있다. 올가을 이사철에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전세 대란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국민이 시장에서 스스로 설계한 주거복지 제도를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몰아내는 형국이 돼버렸다.

전세의 운명을 쓰면서 만났던 전문가들의 말은 일치했다. 어떤 이는 전세를 “주택 임대차 시장의 바겐세일”이라 했고, 다른 이는 “잘사는 동네와 못사는 동네의 거리를 좁혀주는 사다리”라고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이것이었다. “시장이 전세를 버리더라도 정부는 전세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서민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제도니까.” 정부가 전세 퇴출운동에 가까운 규제를 쏟아내다 화들짝 놀라 월세 규제까지 꺼내며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여당 의원이 “월세가 뭐가 나쁘냐”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걸 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태원준 편집국 부국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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