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불평등한 거래’에 내몰린 시간강사들

코리안 티처, 서수진 지음, 한겨레출판사,284쪽, 1만3800원

대학교 한국어학당이 배경인 ‘코리안 티처’는 취약한 지반 위에 서 있는 네 명의 시간강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이들이 서 있는 교실은 교육 서비스를 재화로 사고파는 거래 장소이면서, 강사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 시험장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얼마나 재미있는가.” “얼마나 돈이 되는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 두 가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고, 또 이 두 가지에 대해 답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 싶다. 책을 만든다고 하자. 회사의 대표는 물어 볼 것이다. 얼마나 재밌어? 얼마나 팔릴 것 같아?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재밌어? 시청률은 얼마나 나올 것 같은데? 새로운 컬래버레이션을 선보이는 신발을 디자인한다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다.

사람들이 얼마나 재밌어 할 것 같아? 판매는? 이런 예는 끝도 없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선명한 질문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것을 ‘재미’라고 할지, 어떤 것을 ‘가치’ 있다고 할지는 각자의 이성과 감성에 따라 결정되는 주관적인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기준은 대답에 이르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재미와 돈으로 대답을 한정짓게 만드는 선제적 조치로서의 기능이 더 강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재미있거나 돈이 되지 않으면 무엇도 도모하지 말라는 말을 우리는 이렇게 질문의 형식으로 던진다. 마치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자유라는 색깔로 표현한다. 종종 세상이 우리를 속이는 방식이 이와 다르지 않다.

앞선 두 가지 질문은 서효인 시인이 지난주에 소개한 소설 ‘타오르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발췌한 핵심 문장이다. 재미와 돈이라는 두 가지 가치로 만들어진 어느 마을의 비윤리적 관광 상품이 그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만을 뜻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것들 중에는 평범한 수준에서의 재미와 돈을 충족시키는 소비재가 있는가 하면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소비재도 있다. 소설에서처럼 살인사건을 관광 상품으로 만든 경우도 있고 우리가 경악하며 목도한 바와 같이 성착취물을 판매하는 행위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항상 만든 사람과 만든 것을 소비하며 호응하는 사람, 즉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거래라는 행위가 있다. 인간에게 경제적 자유를 선사하는 거래는 때로 거래할 수 없는 것까지 거래할 수 있게 하는 비윤리적 행위의 도구가 된다. 문득 궁금하다. 우리는 무엇을 어디까지 거래할 수 있을까.


내가 오늘 소개할 책은 서수진의 소설 ‘코리안 티처’다. 이두온의 ‘타오르는 마음’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통의 이야기여서 두 작품을 연결한다는 게 조금은 엉뚱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새삼스럽지 않은 진실. 우리를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진창으로 몰고 가는 것은 언제나 보통의 얼굴이 숨기고 있는 잔혹한 현실이었다. 올해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일하는 네 명의 시간 강사를 중심으로 그들이 얼마나 취약한 구조 안에 불안하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다양한 상황을 통해 보여 준다. 소속되었으나 완전히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소외감과 그러한 배제에서 비롯되는 열악한 처우 및 권리의 침해들. 이를테면 학생들의 강의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강사 평가 시스템은 강사를 서비스 생산자로, 학생을 서비스의 소비자로 특정함으로써 그들이 주고받는 교육을 하나의 재화로, 즉 거래 대상인 소비재로 격하시킨다.

“우리는 정이야. 학생이 갑이고, 당신이 을이고, 바로 옆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책임 강사들이 병이고, 나와 같은 평강사들은 정이야.”

교육이 소비재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매하는 사람의 권리와 판매하는 사람의 권리는 동등해야 할 것이다. 시간 강사에게는 판매자에게 확보된 권리가 없다. 이 불평등한 거래 관계가 소설이 말하는 핵심이다. 각종 모멸적인 상황들에서 시간 강사들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곧 다음 학기 수업 배정에서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학생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어학당에서는 학생들의 강의평가가 강사를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극중 강사들은 학생들이 촬영한 몰카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없고 온당하지 못한 평가 시스템에 대해서도 문제제기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불만을 접수할 수 있는 신고센터 같은 게 있을 리도 없다.

불평등한 구조의 거래 속에서 한국어 수업은 어디론가 다 휘발되고 없다. 거래 그 자체만 남아 있는 이 빈곤한 교실에서의 불통은 그들 각자의 한국어 능력에 차이가 있어서는 아니다. 교환되지 못하는 건 언어가 아니라 그것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존재다. 상품은 그들이 주고받는 수업이지 그들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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