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남았다

[책과 길] 팬데믹 1918 / 캐서린 아놀드 지음, 서경의 옮김, 황금시간, 400쪽, 1만8000원

‘팬데믹 1918’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고,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기 시작한 1918년의 상황을 다룬다. 20세기 최악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인 스페인 독감의 한가운데에 놓인 이들의 회고록 등을 바탕으로 당시를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유례없는 전쟁이 유행병 확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일상의 피해와 대응은 어땠는지 살펴볼 수 있다. 사진은 1918년 12월 미국 시애틀에서 미 육군 39연대가 프랑스로 가기 위해 마스크를 쓴 채 행진하고 있는 모습. 황금시간 제공

‘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제1차 세계대전 휴전을 이틀 앞둔 1918년 11월 9일 38세로 세상을 떠난다. 전투에서 입은 두부 총상에서 회복 중이었으나 스페인 독감의 고비를 넘지 못했다. 파블로 피카소 등이 참석한 그의 장례 행렬은 공교롭게도 휴전 협정을 축하하는 군중과 뒤섞인다. 장례식에 참석한 소설가 블레즈 상드라르는 “파리는 축제 분위기였고, 아폴리네르는 죽었다. 나는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어이없는 상황이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책 ‘팬데믹 1918’에 나오는 이 장면은 평화의 환희와 질병의 슬픔이 교차하는 아이러니한 순간을 묘사한다. 4년 넘게 이어진 참혹한 대전이 마무리되는 순간에도 그 해 봄부터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지속됐다. 저자는 “11월에 휴전 협정은 조인되었지만 의학과 질병 사이에는 휴전이 있을 수 없었다”라고 썼다. 책은 이처럼 눈앞의 적과 싸움을 끝낸 해에 새로 시작된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제1차 세계대전보다 많은 최대 1억 명이 사망한 20세기 최악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겪은 이들의 회고록, 문서, 가족의 기억으로 당시를 재구성했다.

스페인 독감 ‘배양 접시’된 전쟁

스페인 독감은 그 이름부터 전쟁의 산물이다. 병의 기원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스페인에서 시작됐다고 보긴 힘들다. 언론 검열로 유행병 보도가 거의 불가능했던 참전국과 달리 중립국인 스페인에선 피해 상황이 적극 보도돼 병의 진원이 스페인인 것처럼 알려졌을 뿐이다. 이름뿐 아니라 병의 진행과 확산 역시 전쟁과 밀접하다. 총력전의 양상을 띤 제1차 세계대전은 병력의 집결과 이동 규모에서 그 전과 차원이 달랐다. 대규모 전쟁에 수반되는 전염병이 창궐하기에도 전에 없이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다.


책에서 ‘페트리 접시(세균 배양용 접시)’로 명명된 프랑스 에타플 지역을 보자. 에타플은 보병기지, 훈련장, 감옥, 병원, 사격장, 묘지 등이 있는 대규모 군사 기지였다. 그러면서 전쟁을 위한 말 수 천 마리, 식량 조달을 위한 돼지와 오리 등 동물도 함께 있었다. 여기에 탄약과 보급품을 나르기 위한 중국인 노동자까지 대거 동원됐다. 보병 집결지에다 환자, 부상병, 독일군 포로까지 전쟁에 관련된 모든 이들과 동물이 한데 섞이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부대 훈련과 이동도 유행병을 부추겼다. 전쟁 후반에 참전해 대서양을 건너야 하는 미국이 대표적이었다. 애국심의 열기로 미국은 각지에서 400만 명이 자원입대하거나 징집됐다. 당시 전염병학자였던 빅터 C. 본 박사는 “각지에서 모여든 장정들은 각자 고향의 전염병을 집결지로 가지고 왔다”고 전했다. 병력을 전장으로 실어 나르는 수송선도 ‘과적’이 일상이었다. 미국 수송선 레비아탄호의 경우 정원은 6800명이었지만 50% 과적은 문제로 생각지도 않았다.

유행병에 대한 전문가의 경고와 우려는 전쟁의 대의 앞에 자주 버려졌다. 1918년 2월 미국 캔자스주 헤스켈에서 격렬한 증상을 동반한 인플루엔자가 유행하자 그 지역 의사는 워싱턴에 위험성을 알렸다. 하지만 전시 분위기였던 워싱턴은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자는 “정부는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데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것이 국가적 사기 진작을 이유로 치명적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경고를 무시해버린 첫째 사례일 것”이라고 말했다. 병력 9300여병을 싣고 이동하던 레비아탄호는 출항 24시간 내에 스페인 독감 증상이 속출했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배에 타고 있던 한 장교의 회상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워싱턴에 상황을 보고했지만 연합군의 지원 요청이 너무나 절실했기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가야만 했다.”

1918년의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두기’

1918년은 바이러스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의 정체도 알 수 없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이미지를 일반인도 확인할 수 있는 오늘날과 차이가 있다. 하지만 책에 묘사된 팬데믹 상황은 오늘날과 자주 겹쳐진다.

마스크를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당시 마스크는 바이러스를 걸러내지 못했지만 1918년이 되면 의료진은 물론이고 경관, 타자수,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마스크가 일상이 됐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보건국 책임자는 “공공도로 또는 공공장소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마스크 또는 가리개를 착용해야 한다. 음식을 먹을 때만 예외로 한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 체포된 시민이 잇따랐다. 착용을 놓고 총격이 발생하는 일도 있었다. 1918년 10월 28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마스크 착용을 거부한 편자공과 경찰이 몸싸움을 하다 실탄이 발사돼 편자공이 중태에 빠진 사건을 보도했다.

1918년의 ‘사회적 거리두기’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보드빌 극장은 독감을 예방한다는 이유로 관객을 절반만 받도록 허락 받았다. 옆 자리를 비우기 위해서다. 시카고에선 장례식을 금지했다. 장례엔 장의사, 장의사 조수, 목사, 운전사를 제외하고 유족이나 친구 10명 이하만 참석하게 했다.

조심하는 한편엔 인간의 오만도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인플루엔자의 확산에도 뉴욕시 보건국장 로열 S. 코플랜드는 학교와 극장을 폐쇄하는 기본적인 조치도 거부했다. 그는 “그 극장들의 위생 상태를 내가 보장한다”고 공언했다. 그날 뉴욕에선 345명이 인플루엔자로 사망했다. 필라델피아시는 ‘독감의 원인인 파이퍼균을 분리했다’는 필라델피아핍스연구소의 발표를 들은 후 대규모 퍼레이드를 허가했다. 백신 개발이 멀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행진이 있은 지 하루 만에 새 감염 사례 1635건이 보고됐다. 물론 백신은 개발되지 않았다.

책은 ‘코로나 시대, 시의적절한 반면교사’라는 한국어판 서문 제목처럼 1918년과 현재를 자주 비교하게 만든다. 그래서 저자의 다음 말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스페인 독감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의료진의 헌신, 작은 행동으로 서로를 보살피는 보통 사람들의 인류애와 친절, 그리고 사랑이 있기에 그것이 가능하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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