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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똑같은 일상 벗어나고픈 여자들의 수다

홍상수 감독 ‘도망친 여자’ 17일 개봉

오는 17일 개봉하는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의 한 장면. 홍 감독은 이 영화로 지난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인 은곰상을 받았다. 영화제작전원사 제공

이 영화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찌질한 남자’. 하지만 늘 등을 지고 서 있다. 이 영화의 초점은 다른 곳에 맞춰져 있다. 삶의 안팎에서 자신을 옥죄는 것들로부터 ‘도망친 여자’들의 몸짓과 표정이다. 시종일관 여성들의 잔잔한 대화를 쫓는 영화는 역설적으로 우리 삶 근저에서 일렁이는 거센 파도를 생생하게 포착한다.

지난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가 17일 공개된다. 홍 감독이 연출한 스물 네 번째 장편이면서 연인 김민희와 함께한 일곱 번째 작품이다. 김민희와 열애를 알린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이후 작품으로만 세상과 만난 홍 감독 영화는 개인사를 은유하는 듯한 장면도 적지 않았었다. 외재적 분석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도망친 여자’는 어떤 ‘변화’를 유추하게 한다.

홍상수 감독. 영화제작전원사 제공

영화 얼개는 간단하다. 주인공 감희(김민희)가 남편이 출장 간 사이 세 명의 친구를 만나는 과정이 옴니버스식으로 나열된다.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룸메이트와 함께 생활하는 영순(서영화), 많은 돈을 모아 부모에게서 독립해 새로운 동네로 이사온 수영(송선미), 감희와 예전 사랑했던 정선생(권해효)과 결혼한 우진(김새벽)이 세 친구다. 영화는 인물들을 특유의 거친 줌아웃·줌인, 뚝뚝 끊긴 롱테이크로 쫓아간다.

잔잔한 이 작품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은 여성들의 대화 행간에 녹아있는 삶의 편린이다. 이들은 서로 사는 얘기를 늘어놓는데 감희는 늘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지난 5년 동안 남편과 하루도 떨어져 살지 않았다”고. “사랑받는 느낌이 든다” “난 운이 좋은 것 같다”는 이야기와 함께.

하지만 감희는 쓸쓸해 보인다. 감희의 말에서 ‘남편’을 지우면 알맹이가 없어져서일까. 남편에 기대어 살아온 감희는 얼마 전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감희가 운영하는 꽃 가게는 “일이 없고” 한가롭다. 삶이 허전하다.

반면 친구들의 삶은 생기롭다. 수영은 집으로 찾아와 구애하는 지질한 남자 시인을 내쫓는 한편 필라테스 강사로 돈을 모아 젊은 건축가와 새 사랑을 꿈꾼다. 도시 텃밭을 일구는 영순은 룸메이트와 행복한 일상을 꾸린다. 감희는 “집이 멋지다” “젊은 남자와 연애한다”며 부러워하지만 실로 그가 친구 삶에서 갈구하는 것은 자유로움과 주체적인 행복이다. 우진은 감희에게 말한다.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그게 어떻게 진심일 수 있겠어?”. 남편의 부재로부터 변화의 실마리를 얻는 이 영화에는 남자들이 얼굴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이번 영화에서 단발로 등장하는 김민희는 작품을 밀도 있게 끌고 나간다. 서영화 송선미 김새벽 등 감독과 오래 합을 맞춰온 배우들의 연기도 생생하다. 특히 홍 감독 전작에서 일상적 시퀀스 안에 녹아든 긴장감을 사랑했던 관객이라면 또 한 번 매료될 만한 작품이다. 유머 포인트가 녹아든 대화들에 어떤 작품보다도 팽팽한 줄다리기가 숨어 있어서다.

영화는 독립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감희를 클로즈업하면서 마무리된다. 끊임없이 파도가 부서지는 장면에서 관객은 감희의 삶에 찾아올 변화를 엿보게 된다. 자신을 옥죄던 것들과 공허함으로부터 도망을 선언한 감희의 삶은 다시 한번 세차게 일렁이기 시작한다. 러닝타임 77분, 청소년관람 불가.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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