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한 가문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가훈이라는데, 여전히 실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스쳐 지나가듯 광고문에서 본 글귀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제도적 특권을 누리는 사회적 상류층 계급이 감당해야 하는 도덕적 책무와도 일맥상통하는 가치다. 그러나 이는 전근대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 계급이 가진 특별한 자기인식과 연관된 윤리적 행동이다. 왕이 백성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하듯이 다분히 수직 위계적 관계 인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시민사회적 시각에서 보자면 행동은 너그럽고 인자한 일이되 그 전제가 상당히 무례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지방 유지 입장에서 자신의 세력이 뻗어있는 영토 안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내 통치의 부덕함에 더 방점이 찍힐 수 있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사람 참 삐딱하군요. 굶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전제가 어떠하든 일단 살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런 반론도 있을 법하다. 물론 사회적 특권층의 오만함을 지적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감정에서든 그런 ‘노블’한 책임조차도 사라진 오늘날의 사회 상황은 차라리 그 시절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자괴감이 들게 하지 않나. 그렇다고 어찌 앞으로 나아가는 인류 역사를 뒤로 돌리랴. 다만 내 관심은 ‘생존의 바운더리’이다. 나는 과연 나의 어느 경계까지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을까, 기꺼이 책임지려 하는가. 이에 대한 성찰이다.

가장 최근까지 최소단위의 바운더리는 가족이었다. 아무리 생계가 어려워도 가족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마지막 하한선이었다. 그게 무너진 상징적 해가 1997년 외환위기였고, 이후 우리 사회는 점점 부양해야 할 가족을 갖는다는 것이 버거움을 넘어 비효율로 간주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4B(비연애, 비섹스, 비결혼, 비출산) 운동이 반드시 이 하나만의 이유로 시작된 것은 아니나, 누구도 나의 안전과 생존을 기꺼이 감당해주지 않는 후기 근대사회에서 이제 생존의 바운더리 최소 단위는 ‘나 하나’가 된 셈이다. 더구나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 사태는 겨우겨우 버텨왔던 수많은 서민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생존은 이제 나이를 불문하고 시대적 키워드가 됐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 나라 가족 공동체라는 대안을 말해왔고 이를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려 해왔던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이 사회 안에서 존재해야 할까. 모두가 대면이냐 비대면이냐 예배 형식만을 논하는 시점에, 오히려 우리가 일상을 예배처럼 살아내기 위해 관심해야 하는 것은 생존의 바운더리가 아닐까 싶다. 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의 어디까지를 우린 살려낼 수 있을지. 신앙적 우월함으로 이웃에게 다가감이 아니다. 도덕적 명령도 아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방식이요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전염병이 창궐해 사회적 취약계층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그때 사회적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꺼이 병든 자 가까이 다가가 이웃이 돼줬던 기독교인들은 별명을 얻게 됐다. ‘파라볼라노이!’(위험을 무릅쓰는 자들) 에너지도 자원도 시간도 한계를 가진 사람으로서 어찌 전 인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나. 그러나 역량에 따라 지금 당장 내가, 우리 교회가 책임질 수 있는 생존의 바운더리는 있기 마련이다. 저마다 각자도생하자는 세상 한복판에서, 그래도 우리는 교회로 살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나 이외에 한 사람은 더 살려내면서.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신청하기

국내외 교계소식, 영성과 재미가 녹아 있는 영상에 칼럼까지 미션라이프에서 엄선한 콘텐츠를 전해드립니다.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