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아임 쏘리 법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한 커플이 있다. 여성이 잠시 떨어져 냉각기를 갖자고 하자 남성이 만류한다. “너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어. 내가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 말을 하기가 참 힘들어. 네가 후회하지 않게 내가 잘할게, 약속해. 행복하게 해줄게.”

음악을 좋아하는 독자는 눈치챘겠지만 그룹 시카고의 ‘미안하다는 말은 하기 어려워’(Hard To Say I’m Sorry)의 노랫말이 이렇다. 이래서야 과연 여심을 되돌릴 수 있을까 싶은데, 아름다운 멜로디 덕분인지 곡은 크게 성공했다.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2주 동안 1위를 차지했고, ‘한국인이 사랑하는 올드팝’ 순위를 매기면 지금도 상위권에서 빠지지 않는다.

초보 운전 시절에는 접촉사고가 나도 절대 상대 운전자에게 사과해선 안 된다는 조언을 들었었다.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가는 사고 책임이 내게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사고가 나면 요즘처럼 각자 보험사에 연락한 후 가던 길 가는 게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 차 세워놓고 운전자끼리 목소리 높이는 일이 흔하던 시절에나 유효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료 분쟁의 위험이 상존하는 의료계도 상황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책 ‘참을 수 없는 거짓말의 유혹’은 미국 의사들 사이에서 ‘환자나 환자 가족에게 사과하지 말 것’이라는 불문율이 깨진 건 이른바 ‘아임 쏘리 법’(I’m sorry law)이 생기면서부터라고 했다. 의사의 사과나 위로의 뜻을 담은 말이 법정에서 의사가 의료 과실을 인정했다는 증거로 사용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다. 이 법은 1986년 매사추세츠주에서 처음 제정됐고 이후 대다수 주가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흔히 ‘먼저 사과하면 지는 것’이라고 말하듯 사과는 오랫동안 패자의 언어로 치부돼 왔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 모리스 슈바이처 교수는 사과란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신뢰를 다시 쌓을 수 있는 가장 파워풀한 도구라고 했다. 실제로 ‘아임 쏘리 법’ 이후 의사들이 더 솔직해지면서 환자들의 분노가 가라앉아 의료사고 소송이 대폭 줄었고, 소송까지 가더라도 합의에 이르는 기간이 단축됐으며, 합의금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에게도 ‘아임 쏘리 법’이 적용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잠깐 해봤다. 위법 여부를 따지기 전에 국민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도록 말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아들의 군 복무 시절 문제로 걱정을 끼쳐드려 국민께 정말 송구하다”고 사과한 건 검찰 수사가 시작된 지 8개월 만이었다.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지만 하루라도 빨랐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재산 누락, 불법 증여, 갑질 논란 등으로 입길에 오르내린 국회의원들 역시 누구 한 명 사과 한마디했다면 국민의 정치 스트레스나 피로감이 조금은 덜할 것이다. 사과의 진정성은 차치하고라도.

시카고보다 먼저 ‘미안하다는 말이 가장 힘들다’(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고 했던 엘턴 존의 노래는 이렇다. ‘(모든 게 끝나버린) 이런 상황은 너무 슬퍼요. 게다가 점점 어처구니없이 흘러가네요.’ 추 장관이나 의혹이 제기된 의원들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많은 주장과 의견이 쏟아졌다. 거기에 정치 문외한이 어설픈 말을 보탤 생각은 없다. 다만 이런 논란이 연일 끊이지 않는 상황이 ‘슬프고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정말 어렵다는 정치인이라면 책 ‘사과 솔루션’의 저자 에런 라자르의 말을 빌려 치켜세우면 태도가 바뀌려나. “사과는 더 이상 약자의 언어가 아니라 담대한 힘을 요구하는 ‘리더’의 언어”라고.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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