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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 청원 3년 돌아보니… 민생 ‘듣는 靑’, 정치 ‘듣는 척’

국민 분노·눈물 보듬다가도… 정치 앞에만 서면 우물쭈물


“음주운전 역주행 참변을 당한 가장의 딸입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탄핵을 요구합니다” “우리 아들 휴가 연장할래요”.

하루 평균 31만여명이 방문하고 800여건의 가지각색 요구가 올라오는 곳, 청와대 국민청원이다. 지난 3년간 1억6000만건(누적 동의 수 기준)의 목소리가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쏟아졌다. 국민청원은 여론 풍향계와 입법 민원 창구라는 순기능이 있지만 정쟁 공간화, 실효성 부재 등 비판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청와대는 제도 개선 논의에 들어갔다고 18일 밝혔다.


n번방 처벌, 윤창호법… 여론의 확성기

지난 10일, 인천 을왕리에서 치킨 배달을 하다 음주운전 차량에 부딪혀 숨진 50대 가장의 딸이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사고 피해자의 딸은 “제발 마지막으로 살인자가 법을 악용해서 미꾸라지로 빠져나가지 않게 부탁드린다”고 했다. 청원이 시작된 후 59만여명의 동의를 얻었다. 가해자는 나흘 뒤인 14일 구속됐다.

국민청원은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철학에 따라 2017년 문재인정부 출범과 함께 등장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개설한 백악관 청원 사이트 ‘위 더 피플(We the People)’을 벤치마킹했다. 권력 정점인 청와대가 전례 없는 방식으로 대국민 소통에 나선 것이다.


국민청원은 동의 건수가 20만명이 넘으면 청와대가 나서서 직접 설명을 한다. ‘청원→여론 폭발→행정부 대책, 국회 입법’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가장 모범적이다. ‘텔레그램 n번방 성범죄 사건’에 대한 국민청원이 대표 사례다. 지난 3월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청원에는 모두 270만여명이 찬성해 국민청원 역사상 최고 동의 수를 기록했다. 이후 n번방 가담자들의 신상이 공개됐고, 성폭력처벌법 등 관련 처벌 규정도 강화됐다.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관련 청원도 비슷하다. 2018년 10월 올라온 청원은 심신미약 등의 이유로 강력범죄에 대한 처벌을 감경해주는 것을 막아 달라는 것이었다. 110만여명이 동의했고, 두 달 후인 그해 12월 감형 의무 조항을 폐지하는 형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밖에 음주운전 사망사고 처벌을 강화한 윤창호법, 스쿨존에서 어린이 대상 사고 시 처벌 수위를 높인 ‘민식이법’ 등이 국민청원을 통해 입법까지 이어진 사례다. 국민 안전과 인권, 범죄자 처벌 요구 등에 있어서 국민청원은 힘이 셌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정책 공간인가, 정쟁 공간인가

그러나 국민청원은 정치 앞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치 공방이 재연되는 무대에 불과하거나 정치 갈등을 증폭시키는 스피커 노릇을 했다.

청와대는 지난 11일 오후, 검찰 인사와 수사지휘권 발동 논란을 빚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해임 또는 탄핵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에 답변을 내놓았다. 청와대는 “수사지휘를 통해 공정성 훼손 우려를 바로잡은 것”이라며 여당 입장과 같은 답변을 내놨다. 추 장관을 해임하라는 야당, 이를 옹호하는 여당의 공방이 국민청원을 통해 되풀이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응원합니다’ 청원에 150만여명,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촉구합니다’ 청원에 146만여명이 각각 동의했던 사례는 국민청원이 세 대결 전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위험 신호였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서울특별시장(葬)에 반대한다’는 국민청원은 장례가 끝난 지 한참 후인 지난 9일에야 답변이 나왔다. 청와대는 “9년간 재직한 현직 서울시장이라는 공적 지위자에 대한 장례”라는 기존 서울시 입장을 전달했다. 청와대로서는 답변할 위치도, 답변할 사안도 아니었지만 ‘20만명 동의’라는 답변 기준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청와대 국민청원은 지금 여론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여론 풍향계’ 역할을 충분히 했다”면서도 “국민이 불편한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기능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최근 ‘시무 7조 상소문’ 경쟁처럼 인터넷 백일장 게시판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정치적 중립성마저 의심받고 있다. 청와대가 추미애 장관 아들의 군 복무 특혜 의혹 관련 청원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비공개 처리하면서다. 박태순 한국공론포럼 상임대표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이미 정책 공간이 아닌 정치 쟁론 공간으로 전환됐다. 청원 공개 여부도 임의적이다 보니 공신력이 생기지 않고 더욱 정치화되는 것”이라며 “청와대 담당자가 나와서 답변하는 차원이 아니라 청원 내용을 제도화할 수 있어야 실효성이 생긴다”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정부 바뀌어도 소통 계속될까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국민청원제도의 개선 및 폐지를 요구합니다’라는 청원도 올라와 있다. 청원인은 “현 시점에서 이 청원제도는 정부와 국민, 국민과 국민 사이의 가교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국민청원을 폐지하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오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다.

박태순 상임대표도 “지금처럼 숙의 과정이 없는 즉자적인 청원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며 “청와대 국민청원 대신 독일의 ‘e-청원’처럼 민의의 전당인 국회가 청원을 담당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국민청원 공개·비공개 기준 정립, 거짓정보 사후 모니터링 등 운영 방식 개선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결국 실명제가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청와대도 고심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까지 이어진 ‘위 더 피플’처럼 다음 정권에서도 국민청원이 이어지려면 개선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강정수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국민청원이 정부 정책, 제도 개선과 관련해 긍정적 변화가 있는 반면 정쟁적 공방이 이뤄진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며 “기술적 요소보다는 정무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어떻게 개선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회 등 각 기관이 국민청원을 도입해 삼권분립에 따라 청원 기능을 분담하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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