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들끓는 감정과 적당한 거리두기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 박한선 지음. 아르테, 360쪽, 1만6000원

올해의 책을 만난 것 같다. 3개월 안에 이 소설보다 더 내 마음 같고 이 소설보다 더 나를 깨어 있게 할 책을 만날 것 같진 않다. 이따금 알 수 없는 확신에 사로잡힐 때가 있지 않나? 지난주에 소개된 오테사 모시페그의 소설 ‘내 휴식과 이완의 해’을 읽는 순간 전에 없던 확신이 왔다. 실은 인생의 책이라고 말하려다 올해의 책으로 자중한 거다.

‘마음으로부터의 일곱 발자국’은 ‘예기’의 예운편에 나오는 7개의 감정(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싫음, 욕심)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감정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보다 긴 안목으로 자신을 들여다볼 것을 당부하는 책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푹 자고 싶은 주인공은 1년 동안의 동면을 위해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는다. 동면 프로젝트에 성공하기 위해 정말이지 꾸준히 심리 상담을 받는 주인공은 거짓으로 불면을 호소하며 한 번 먹으면 3일 동안 잘 수 있는 약을 처방받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힘껏 항변한다. 자신은 단지 잠을 자고 싶을 뿐 죽고 싶은 건 아니라고.

인생에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바라는 유일한 한 가지는 휴식과 이완을 통해 삶을 정지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건 그다음 일이다. 다시 살고 싶을까? 이 삶을 계속하고 싶을까?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모든 것이 초기화된 상태에서 그녀는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생기는 변화에 대한 궁금증은 이 소설을 끌고 가는 중심축이다.

견디기 힘든 일이 벌어지면 내 몸도 자고 싶어 한다. 사회생활 10년차, 인생 35년차에 이르는 동안 내게도 남들처럼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알게 된 작은 사실이 있다면 내 마음이 고통에 빠질 때 내 몸은 잠을 원한다는 것이다. 나와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기도 할 테고,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감정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할 테다. 한시도 멈춰 있지 않고 작동하는 들끓는 감정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잠이라는 사실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동면 프로젝트가 얼마나 현실적인 상상에서 출발했는지 말해 준다.


소설은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일련의 사건을 경험하며 변한다. 변화는 때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한다.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성장은 고통을 동반한다. 소설이 변화와 성장을 통해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만들어 준다고 할 때, 소설은 고통 받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1년 동안의 수면이라는 전무후무한 상태를 통과하고 나면 주인공의 몸과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우리가 이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읽게 되는 중심축이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소설을 읽는 내내 그가 잠에서 깨어난 다음에 보는 세상이 궁금했다. 소진된 주인공이 잠에서 깨어나 생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때, 그녀를 깨어나게 한 장면은 911 테러로 무너지던 쌍둥이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의 이미지였다. 살기 위해서 삶과 죽음을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삶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득 찬다.

경외감이라니. 나는 새삼 이 단어가 멀게 느껴져 ‘경외감’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봤다.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감정. 예찬하면서도 무서워하는 감정. 깨어 있다는 건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이구나. 이 책을 읽고 자연스럽게 눈길이 머문 책이 있다. 신경 인류학자 박한선의 에세이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이다. 제목이 좋았다. 지금의 나야말로 마음으로부터 한두 발자국만이라도 멀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이기도 했다. 이 책에 따르면 예기의 예운 편에는 다스려야 할 칠정으로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싫음, 욕심을 꼽는다. 책의 제목이 일곱 발자국인 이유도 이 일곱 가지 감정을 알고 감정과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는 데에서 온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멀어지는 상상을 했다. 지금 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으니 슬픔으로부터 멀어지는 상상을 했다. 슬픔을 포기하는 일과는 달랐다. 잠시 잠을 자듯 슬픔을 베고 누웠다. 자고 일어났을 때 경외감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발작 떨어진 채 자신을 내버려두는 용기야말로 슬픔이 가르쳐주는 경외감이 아닐까. 나는 그냥 슬픔을 덮고 누웠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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