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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트럼프의 안보장사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장사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이익을 얻으려고 물건을 사서 팖. 또는 그런 일’이라고 설명한다. 고대로부터 물건을 곡물을 매개로 바꾼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애초 이런 순수한 뜻과 달리 언제부턴가 이 단어엔 장삿속, 장사치에서처럼 기만과 협박의 뉘앙스가 얹혀져 사용되고 있다. 여의도 정가에 안보장사라는 말이 비아냥의 뜻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분단 상황으로 국민을 협박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양치기 소년들이 건재한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안보장사가 한국 보수의 전유물은 아닌 듯하다. 코로나19 확산 원인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여온 미국과 중국은 아예 대놓고 국가안보를 내세워 상대국을 압박하고 있다. 20세기 미국과 소련 간 동서냉전 대결에서 근동, 중남미 등 제3세계 국가들이 볼모로 희생됐다면 21세기 G2(주요 2개국) 대결엔 상대방 기업체들이 희생양으로 등장하는 점이 다르다.

미국 정부는 무역전쟁 연장선에서 중국의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를 겨냥해 기술 도용을 문제삼아 거래 중단 조치를 취하던 데서 나아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미국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을 추방하려 하고 있다. 미국 내 가입자 1억명 이상을 보유한 동영상 공유 앱 틱톡이 코로나 사태 이후 첫 희생물로 지목됐다. 동영상에 가입한 미국인들의 정보를 중국 정부가 빼내 국가안보에 위협적인 도구로 사용할 것이라는 공화당 의원들의 주장을 들이댔다. 미국 언론들은 중국 정부가 이미 미국 소셜네트워크(SNS) 업체들의 중국 내 영업을 금지하고 있으므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를 ‘행동 대 행동’이라는 식으로 비교적 관대하게 인식하는 듯하다.

어이없는 일은 그다음부터 벌어지고 있다. 틱톡이 국가안보에 저해된다는 주장을 입증한 뒤 쫓아내면 될 일을 굳이 미국 기업으로 만들려 애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이크로소프트(MS)가 협상할 때는 미 정부가 집 주인이므로 인수 성사 시 권리금을 내야 한다고 장사치답게 너스레를 떨었다. 협상 당사자가 아닌데도 시한까지 정해 통째로 인수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조건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MS를 제치고 우선협상자로 등장한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최고경영자가 2016년 트럼프의 대선 당선에 기여한 후원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진정성이 의심받기 시작했다. 이쯤되면 중국을 상대로 600억 달러(69조원) 상당의 전리품을 획득했음을 보여줌으로써 11월 대선에서 표를 얻으려는 안보장사와 다를 게 없다.

중국 입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방식의 인수·합병은 중국 기술 굴기의 대표적 결실 중 하나를 미국에 헌납하는 셈이다. 미국이 화훼이의 미국 기술 도용을 의심하면서 틱톡을 자국 기업에 넘겨주려는 것은 ‘약탈’에 가깝다는 중국 네티즌들의 분노는 그래서 나온다. 모기업 바이트댄스와 오라클의 인수·합병 후 신설될 ‘틱톡 글로벌’의 지배주주 자격을 놓고 이견이 불거지면서 틱톡 합병 협상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중국 정부는 미국의 화웨이 제재에 맞서 미국 기업 시스코를 겨냥한 제재에 나서는 등 분위기가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다.

개별 기업을 볼모로 삼은 두 강국의 프락치 전쟁은 서부개척 시대 무법자들의 결투를 보는 것 같다. 우리 기업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때처럼 어느 줄에 서야 할지 선택을 강요받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무역 파트너들을 상대로 중국 중심의 글로벌가치사슬(GVC) 대열에서 이탈하라고 압박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줄서기는 벌써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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