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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극성팬이 여당의 에너지원이라니

천지우 논설위원


美 유권자 양극화된 상황서
지지층에 집중하는 전략 구사
분열 심화되고 민주주의 침식
韓 여당도 지지세력만 바라봐
논란 이슈에 노골적 편 가르기
과도한 공격과 대응 반복돼
불편한 질문 안받는 대통령도
민주주의에서 퇴행하는 모습

“부시 대통령은 ‘분열이 아닌 통합’을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지만, 당파 간 전쟁은 그의 임기 8년 동안 더욱 심화됐다. 그는 칼 로브 고문의 조언에 따라 초당적 협력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우측 행보를 이어나갔다. 로브는 유권자 집단이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상황에서는 유동층을 포기하고 지지자 집단에 집중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민주당(야당)이 대통령의 행보를 막기 위해 자제의 규범을 저버렸다면, 공화당은 그들의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그 규범을 외면했다.”

20년 전 미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설명인데, 몇몇 이름과 단어만 바꾸면 지금 한국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문재인 대통령도 ‘국민 통합’을 강조하며 취임했지만 지금까지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없다. 정권이 논쟁적 사안을 대할 때마다 노골적으로 편 가르기에 나서면서 오히려 분열이 심해졌다. 여당은 지지층만 바라보는 듯하다. 23일 한 토론회에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강성 지지자가 과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당에)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문 대통령이 2017년 대선후보 경선 때 지지자들의 상대 후보 공격을 두고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서두의 인용문은 미국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함께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한 대목이다. 두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미국은 더 이상 민주주의 모델이 아니라고 한탄하며 이 책을 썼다. 이들에 따르면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하던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이 2000년대 들어 빠르게 침식됐다. 유색인종 인구 급증 등의 영향으로 정당의 색깔이 선명해지고 지지층이 재편되면서 상대를 적으로 바라보고 정치를 전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한국의 상황은 미국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상대를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문제적 이슈가 하나 나오면 한쪽에선 죽자 사자 달려들고, 다른 쪽은 ‘한번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억지를 부리며 두둔한다. 이런 패턴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공격도, 대응도 모두 과하거나 지겹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들은 미국 민주주의 붕괴에 현 여당(공화당)의 책임이 더 크다고 봤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여당이 “상대가 저열하게 나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간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는 태도를 취하면 좋을 텐데 그런 적이 별로 없다.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못 견뎌 매번 발끈한다. 문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과 감사원의 수장이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비난을 퍼붓고, 중앙선거관리위원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선 민주당이 추천한 선관위원은 선관위가 민주당에 불리한 결정을 못 내리도록 하는 게 임무라는 말을 대놓고 한다. 각 기관의 정치적 중립 의무는 안중에 없이 정권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 행태다.

어떤 사안을 놓고 국민 분열이 깊어질 때는 대통령이 나서서 진정시키거나 본인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며 반대편을 설득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안 보인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윤미향 의원, 추미애 법무부 장관 관련 의혹 등 여권에 불리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문 대통령의 견해를 듣기가 쉽지 않다. 계속되는 침묵 또는 회의에서 언급한 짤막한 말을 갖고 의중을 짐작할 뿐이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거의 매일 나오지만 대부분 회의나 행사장에서 필요한 말,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식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궁금해하는 현안에 대해 질문을 받고 답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기자회견을 100회 넘게 했고 ‘국민과의 대화’도 여러 차례 했다. 반면 문 대통령은 지금까지 기자회견 4회, 국내 언론 인터뷰 1회, 국민과의 대화 1회뿐이다.

이미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고, 이런저런 악재가 이어져도 지지율은 별로 떨어지지 않으니까 굳이 민감한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질문을 받지 않고 회의 석상에서 근엄한 말씀만 하고 계시니 마치 궁궐의 임금 같다. 그래서인지 청와대 국민청원에 상소문도 올라온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 민주주의지, 왕정은 아니지 않나.

천지우 논설위원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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