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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데이지호 진상 규명서 가장 중요한 건 공개 조사”

1980년 화물선 침몰로 동생 잃은 영국인 폴 램버트씨 화상인터뷰

영국 국적 화물선 더비셔호는 1980년 9월 10일 일본 오키나와 인근 해역에서 갑자기 침몰했다. 당시 이 배에 타고 있던 19세 막냇동생을 잃은 폴 램버트는 더비셔호 가족대책위원회 대표를 지내면서 진상규명까지 20년의 세월을 바쳤다. 폴 램버트 대표 제공

지구 반대편 영국에서 40년 전에 스텔라데이지호 참사와 같은 아픔을 겪었던 한 남자가 있다. 폴 램버트(68), 그는 1980년 9월 10일 화물선 ‘더비셔호’ 침몰로 19세 막냇동생을 잃었다. 램버트는 더비셔호 가족대책위원회 대표를 지내면서 원인 규명을 이끌어내 ‘더비셔호 참사의 영웅’으로 불린다.

영국인 44명과 함께 일본 오키나와 인근에서 가라앉은 더비셔호는 선박 종류, 심해수색, 가족의 투쟁 캠페인 등에서 스텔라데이지호와 닮은꼴이다. 광탄석 운반선인 스텔라데이지호는 지은 지 25년이 지난 배였다. 두 배가 다른 점은 더비셔호는 긴 시간을 지나 침몰 원인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국민일보는 더비셔호 참사 40주기를 맞아 지난 2일 램버트와 ‘줌’으로 화상인터뷰를 했다. 28일로 스텔라데이지호는 침몰한 지 1278일째가 된다.

더비셔호 참사 40주기를 맞아 지난 2일 국민일보와 화상인터뷰를 하는 램버트 대표.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심정이 어땠나.

“어디에든 살아 있을 거라 믿었다.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죄책감에 시달려 잠을 잘 수도 없다. 시간이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말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사고 한 달 뒤 마거릿 대처 당시 총리에게 공식 진상조사 요구 서한을 보냈다.

“정부는 침몰 원인이 태풍이고,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할 테니 공개조사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선주들도 마찬가지였다. 1972∼1990년 6주에 1척꼴로 배가 가라앉았다. 수천명이 죽음에 내몰렸는데 아무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에겐 안전보다 이익이 중요했다. 침몰 9년 뒤 이뤄진 정부 첫 진상조사의 결론도 ‘천재지변’이었다.”

-결국 가족들이 직접 캠페인에 나섰는데.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ITF) 지원을 받아 80만 파운드(약 12억원)를 들여 침몰 14년 만에 배 위치를 알아냈다. 정부도 뒤늦게 심해수색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용은 영국 정부와 유럽연합(EU)이 100만 파운드씩 부담했다. 97년 심해수색으로 사진 13만5000여장, 영상 200시간 분량을 확보했다. 정부는 이 증거를 바탕으로 3년 뒤 2차 진상조사 청문회를 열었다. 석 달간 이어진 청문회에 전문가 26명이 나와 증언했다. 정부는 가족 참여를 보장했고, 법률대리인 비용도 부담했다. 정부는 더비셔호 침몰 원인을 밝힌 뒤 선박 안전에 대한 20가지 권고사항을 법제화하기도 했다.”

-원인 규명까지 20년이 걸렸는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나.

“참사 원인을 알아내겠다고 죽은 동생에게 약속했고 그걸 지키려 했을 뿐이다.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이 왜 죽었는지 정확한 원인을 알 권리가 있다. 우리는 당시 그 권리를 부정당했다. 정부가 책임지려 하지 않으니 나라도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스텔라데이지호는 어떻게 진상을 규명해야 하나.

“가장 중요한 건 공개 조사다. 모든 회의에 가족이 참석할 수 있어야 하고 정보도 공유돼야 한다. 영국 정부는 전면 재조사를 하면서 심해수색에서 얻은 모든 증거 자료를 가족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가족들은 개별 전문가팀을 꾸렸고, 정부가 비용을 댔다.”

-재난 피해자로서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을 향한 당부는.

“피해자들이 어떤 아픔을 겪었을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제발 예산을 확보해 진상조사를 하라고 간청하고 싶다. 그래야 22명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을 밝힐 수 있다.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은 진상 규명을 넘어 안전사회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도움과 지원이 절실하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

[단독] 스텔라데이지호의 진실, 지금 바닷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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