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글로벌 호구’ 탈출할까… 징벌적손배제 도입 명암[스토리텔링 경제]

도입 불가피하지만, 소송남발 대책 갖춰야


배기가스 배출량을 조작한 차를 판매해 논란이 됐던 독일 자동차 제조회사 폭스바겐은 지난 2월 독일 소비자 26만명에게 차 가격의 15%를 배상했다. 이 회사는 앞서 2016년 미국에서도 소비자 47만5000명에게 총 153억 달러(약 18조원)의 배상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폭스바겐은 배기가스 배출 조작 사건 5년이 다 돼가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외 소비자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 폭스바겐코리아는 올해 초 이 사건과 관련해 1심에서 벌금 260억원을 선고받았다. 배기가스 배출량을 조작한 차량 12만대를 판매해 번 수익에 비해 가벼운 금액이다.

집단소송제, 소비자 구제 길 열어

반면 현대자동차는 2011년 미국 몬태나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한 건과 관련해 2014년 현지 법원에서 2억4000만 달러(약 2470억원)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현대차는 2013년 버지니아주에서도 접촉 사고 때 에어백이 작동하지 않아 머리를 다친 소비자에게 1400만 달러(약 159억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처럼 한국 소비자는 글로벌 기업에 ‘호구’ 취급을 받고 한국 기업은 해외에서 거액의 배상금을 무는 일이 속출하자 국내에서도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법무부는 28일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을 담은 집단소송법 제정안과 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다.

정부가 도입하려는 집단소송제는 분야 제한 없이 피해자가 50명 이상이기만 하면 피해자 중 일부가 제기하는 소송 결과를 바탕으로 같은 피해를 본 모두가 함께 구제받는 방식이다. 특히 정부가 집단소송제에 대해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사항도 적용이 가능하다고 밝히면서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과 가습기 살균제 참사, BMW 차량 주행 중 화재 사건 등 피해자들의 소비자 구제 길이 열렸다는 전망이 나온다.

‘상법에 일괄 적용’ 징벌적 손배

정부는 또 현재 개별 법률로 개인정보 침해 등 제한적 상황에만 적용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상법으로 일괄 적용할 계획이다. ‘상인(기업)’이 고의나 중과실로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면 손해의 5배 이내 범위에서 배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재계는 “기업 활동을 더욱 옥죄는 법안”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지만 도입 찬성 측에서는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으로 오히려 기업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주장도 한다.

참여연대 정책위원인 김남근 변호사는 27일 “징벌적 손해배상을 피하고자 기업이 준법 경영을 하고 소비자 구제에도 나서면 경쟁력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도 “한국이 그동안 기업에 대한 사전(事前) 규제가 많은 이유가 사후(事後) 처벌이 약하기 때문이었는데 징벌적 손해배상 등을 통해 기업이 잘할 수밖에 없게 만들면 오히려 불필요한 사전 규제를 푸는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송 남발’ 부작용 어떻게

그러나 법학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앞서 제도를 시행해온 해외 사례 등을 참고할 때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대표적인 게 소송 남발 가능성이다. 20대 국회 때 발의된 집단소송법 제정안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검토 보고서는 “소송 당사자의 비용이 적고 변호사는 높은 보수 기대가 가능하면서 기업 상대 소송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기업에 대한 소송이 일단 제기되면 그 사실만으로 결과와 관계없이 기업의 신인도와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소송 대국’ 미국에서는 2002년 맥도날드가 광고 내용보다 실제 열량이 높아 비만 위험을 관리하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소비자 집단소송을 당했다. 스타벅스 역시 2016년 “얼음이 너무 많고 커피 양은 적다”는 이유로 500만 달러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집단소송을 겪었다. 궁극적으로는 두 기업 모두 승소했지만 기업 이미지 타격은 피할 수 없었다. 자체 법무팀으로 소송 대응이 가능한 대기업보다 그럴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이 각종 ‘기획 소송’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증권 분야에서만 집단소송을 허용하면서 법원의 소송허가 절차를 거치게 했는데 정부는 이번에 이 제도도 간소화하기로 했다.

‘디테일의 함정’도 여럿 있다. 정부는 ‘손해액의 5배 이내’로 한정했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에 따른 손해배상액이 사안별로 들쭉날쭉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는 “법원의 양형기준이 있는 형사법과 달리 민사는 기준이 없으므로 징벌적 손해배상액이 누구는 2배, 누구는 5배로 나오는 등 액수 산정 논란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민사에도 국민참여재판 도입 논란도

정부가 민사인 집단소송제에 형사사건에만 허용해온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한 것도 논란거리다. 주진열 부산대 교수는 “배심원제를 운용해온 미국에서도 증거 유무보다 감정으로 평결하는 사례가 많은 배심원제의 문제점이 최근 많이 제기되고 있는데 우리가 굳이 그 제도를 확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언론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장 교수는 “한국은 서구 선진국과 달리 명예훼손죄(형법 307조)에 대해 형사처벌을 하고 있다. 여기에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추가하는 건 과잉”이라고 지적했다.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이 자본이나 공인에 대한 언론의 견제 기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다만 징벌적 손해배상이 도입된다 하더라도 언론사에 대한 적용 가능성은 작다는 의견도 있다. 박상인 교수는 “상법 적용 대상은 주로 법인이기 때문에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은 기자 개인보다는 법인 차원의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는 한 적용될 여지가 크지 않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세종=이종선 전슬기 기자 remember@kmib.co.kr

[스토리텔링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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