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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의 알뜻 말뜻] ‘청춘’이라는 말의 함의


청춘이란 말은 과거형이다. 청춘의 와중에 있는 자들에게 청춘이라는 말은 와닿지 않는다. 지나고 나서야 청춘(이었음)을 깨닫는다. 청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었)지만, 청춘이란 말은 흔히 1인칭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3인칭 과거형으로 쓰인다. 더 이상 청춘 아닌 자들이 쓰는 그리움과 회한의 용어. 푸르고 싱그러워 훨훨 날아다녀도 모자랄 것 같은 청춘이란 말이 구슬프고 슬픈 정서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이라고 시작하는 김창완의 노래 ‘청춘’은 1981년 산울림 7집에 수록된 곡이다. 김창완은 그해 나이 27살, 청춘의 나이였다. 청춘의 나이에 청춘을 노래했으나 ‘나를 두고 간 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라고 아직 오지도 않은 가버린 청춘을 앞당겨 슬퍼했으니, 이 역시 미래 시점에서 보는 과거형의 청춘을 노래한 셈이다. 산울림 7집은 이 곡 말고도 여러 노래에 비슷한 서정이 드러난다. ‘흰 종이에 아주 먼 나라 얘길 했지. 죽음이란 글자를 써보았네’라는 ‘먼 나라 이야기’가 그렇다. ‘오늘은 그 어느 누가 태어나고 어느 누가 잠들었소’라는 ‘독백’도 그렇다. 27살은 늙음과 죽음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지만, 촉수가 예민한 자들은 나이보다 더 일찍 생을 알아버린다.

청춘이란 말은 후일담이다. 나이든 자들에게 물어보라. ‘청춘’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단어들을. 그 단어들을 들고 지금 청춘의 한가운데 있는 청년들에게 다시 물어보라.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느냐고. 그들의 답은 ‘아니요’일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고단함과 괴로움, 미숙함과 질풍노도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적외선과 자외선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서 생애 가장 푸른 시절의 환희와 기쁨, 설렘, 순수, 패기, 열정 같은 긍정적인 기억만 남는 법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상실감이 더해지면 청춘 시절은 그야말로 잡을 수 없는 천상의 무지개가 된다. 그 무지개를 잃은 자들이 ‘그땐 그랬지’나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게 되는 것은 세월이라는 짐을 지고 생을 지속해야 하는 자들이 내뱉는 노동요의 추임새 정도라고 이해해두자. 추임새가 지나치면 노래를 망치는 것이긴 하지만.

청춘이란 말은 단독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비교급이다. 청춘을 다 써버린 자들이 말하는 청춘은 실제 청춘보다 오히려 찬란하다. 장르 속성상 대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판타지에 속하는 광고에서 그러므로 청춘은 모든 세대 위에 군림한다. 청춘을 소재로 한 영화도 그렇다. 동서고금에 청춘 시절을 노래하고 젊음을 치켜세우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으나 지나치게 청춘을 찬양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사회적, 상업적 필요에 의한 것은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한다. 가을날에 봄날을 지나치게 그리워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다가올 겨울을 지나치게 두려워할 이유도 폄하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시월이 사월보다 아름답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모든 계절이 바로 우리 자신의 생이다.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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