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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낙태죄 논란의 이면

송세영 종교부장


정부가 제출한 낙태 관련 법 개정안을 두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늘 그렇듯이 이념적·정치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많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면 진보로, 태아의 생명권을 강조하면 보수로 치부하고 세부 쟁점에는 진영논리로 접근한다. 하지만 생명의 문제에 이념적으로 접근하고 진영논리를 대입하는 건 피해야 한다. 성과 생명, 자기결정권과 인권, 개인적·사회적 책임 등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의 해결에 걸림돌이 된다.

낙태는 임신을 전제로 하고 임신은 인공수정이 아닌 이상 성관계를 전제로 한다. 성관계는 자의에 의한 것과 폭력적·강압적인 것으로 나뉜다. 거슬러 올라가면 성교육과 피임, 음란물 범람, 성폭력범죄 예방과 처벌의 문제 등이 얽혀 있다. 임신 이후도 마찬가지다. 상대 남성과 사회의 양육 책임, 임신한 미성년자와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지원 등의 문제가 있다. 이는 낙태할 수 있는 권리만큼 중요한,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문제로도 이어진다. 낙태죄 처벌 조항이 사문화돼 처벌받은 사례가 거의 없고 한국의 인구 대비 낙태 건수가 선진국 중에서 상당히 높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진보적 인사나 단체들이 이들 쟁점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정리하면 대체로 이렇다. ‘음란물에 노출되는 연령이 낮아지고 있고 노출 범위도 넓다. 초등학생부터 조기 성교육을 실시하고 피임교육도 해야 한다. 성적 욕망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이며 미성년자도 성관계를 할 자유가 있다. 임신을 원하지 않으면 피임을 권하되 그래도 임신이 되면 낙태할 수 있게 해야 하고 낙태를 처벌해선 안 된다. 부모의 허락을 얻도록 하면 화장실 출산이나 불법 시술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미성년자도 부모의 허락 없이 낙태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간단치 않은 문제들이다. 패키지로 묶어서 밀어붙여야 할 사회적 합의나 근거도 없다. 논리적 비약도 많다. 음란물 노출의 경우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그 시점이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용인하며 조기 성교육을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미성년자들, 특히 초등학생들의 음란물 노출을 막을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고 노출 피해자들을 위한 심리상담 등 지원책을 마련하자는 의견도 가능하다. 조기 성교육을 꼭 해야 한다면 적절한 수준으로 하되 성범죄 예방 및 성에 따른 책임과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측은 당위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진국 가운데서도 낙태죄를 전면 폐지한 나라는 거의 없다. 동성결혼도 합법화한 나라들이 낙태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태아의 생명권 등이 여성의 자기결정권만큼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교육부가 ‘나다움 어린이책’으로 선정한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를 회수한 것을 둘러싼 논란도 되돌아봐야 한다. 보수정당이나 개신교가 조기 성교육에 반대한다는 식의 이념적 접근으론 편 가르기만 부추긴다.

선진국에선 시행 중인, 우리 사회에서도 합의 가능한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는 게 더 현실적이고 현명한 대안이다. 특히 성폭력범죄의 예방이나 피해자 지원, 남성의 책임, 사회적 양육과 미혼모 지원 등의 문제에선 큰 이견이 없다.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하는 종교계와 생명운동 측은 낙태 반대에만 올인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러한 이면의 문제 해결에 더 관심이 많다. 이념적·정치적 입장을 넘어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면 정부에 대안 마련을 촉구할 수 있다.

낙태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우리 사회 분열과 대립의 새로운 뇌관이 돼선 안 된다. 노동 문제만 대타협이 필요한 게 아니다. 정부가 성과 생명의 문제에 대한 범국민적 공론화에 나서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송세영 종교부장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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